북한, MB정부에 첫 실력행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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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분석이명박 정부의 남북 관계가 출범 한 달 만에 기로에 섰다. 그동안 새 정부의 ‘국제 공조를 통한 비핵화 우선 정책’을 비판해온 북한이 처음으로 북한 내 남측 당국자 철수라는 물리적 압박에 나서며 남북 관계가 급랭하고 있다.

통일부는 27일 북한이 개성공단 내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에 상주하고 있는 남측 당국자들의 철수를 요구, 11명 전원을 0시55분 철수시켰다고 밝혔다. 사무소엔 이에 따라 민간인 3명과 시설관리요원 2명만 남게 됐다. 비슷한 일은 2006년 7월에도 있었다. 당시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하곤 경협사무소의 북측 요원들을 철수시켰고, 남측 직원도 철수했다. 그 뒤 북한은 남측 직원들의 복귀를 막아 4개월간 업무가 중단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번엔 북한이 새 정부 정책에 대한 불만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상황이 다르다. 북한은 철수를 요구하며 ‘상부의 지침’이라고만 설명했다. 개성이 아닌 평양의 수뇌부 차원에서 내려온 지시임을 시사한 것이다.

현재 남북 간 접촉은 중단된 상태다. 그래서 북한이 추가 압박 조치에 나설 경우 남북 관계는 진보 정권 10년의 교류 협력을 마감하고 김영삼 정부 초반기의 극한 대립이 재연될 수도 있다. 북한은 김영삼 정부 출범 초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고, 노무현 정부 출범 전날엔 동해에서 미사일을 시험 발사했다. 새 정부가 등장할 때마다 나타난 기 싸움 성격이다. 그래서 이번 역시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을 탐색하던 북한이 쌓인 불만을 행동으로 나타냈다는 게 통일부와 대북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각에선 “4월 9일 총선을 앞두고 북한이 남북 관계의 논란을 일부러 만들려 한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새 정부의 ‘국제 공조를 통한 비핵화 최우선 원칙’은 ‘우리 민족끼리’를 요구하며 한·미 공조 확대를 비난하는 북한의 주장과 접점을 찾기 힘들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은 전날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1991년 체결된 남북 기본합의서가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말해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6·15, 10·4 정상합의를 사실상 평가절하했다. 두 정상합의를 ‘우리 민족끼리’의 대표적 성과로 간주하는 북한과 철학이 다르다.

정부는 이날 원칙에 위배되는 눈치 보기는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청와대는 외교안보정책조정회의를 연 뒤 이동관 대변인을 통해 “북한의 조치는 남북경협 발전에 장애가 되는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당당한 입장을 갖고 대처하되 불필요한 상황 악화는 막겠다”고 발표했다. 홍양호 통일부 차관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당근책을 내놓진 않을 것”이라며 “북에 뭘 따로 제의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이제 남북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북한이 추가 조치에 나설지에 달렸다. 통일부 관계자는 “북한이 이 대통령이 아닌, 김하중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퇴로는 만들어 놓은 셈”이라고 말했다. 또 개성공단 내 민간인 철수까지 요구하진 않은 만큼 개성공단 사업의 중단까지 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여기서 그칠지는 미지수다. 6자회담이 공전하고 한·미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 폐기를 위한 대북 압박책이 부각될 경우 북한이 민간단체 교류 중단, 이산가족 상봉 중단, 서해 긴장 고조 등으로 압박 수위를 단계적으로 높일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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