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8. 피카디리극장 무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미국에 진출하기 전 작곡가 박춘석씨의 권유로 만든 음반.

미국 라스베이거스 진출을 결정한 나는 일본 활동을 정리하고 일시 귀국했다. 미국 갈 준비를 하는 한편 박춘석 선생의 권유로 음반을 만들기 위해 ‘틸(Till)’ ‘파드레(Padre)’의 번안곡 등을 레코드에 취입하고, 박 선생이 직접 작사·작곡한 ‘초우’를 녹음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즈음 피카디리극장에서 공연을 제의했다. 가수 데뷔 만 3년이 넘었지만 그때까지 나는 우리나라 대중 앞에서 정식으로 노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1960년 개관해 한국영화만 상영하던 ‘반도극장’이 영국 런던의 유명한 예술 거리인 피카디리의 이름을 따 외국영화 개봉관으로 다시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새로 단장한 극장이니 그런대로 무대 공연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영화관에 무대를 만들고 공연을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일본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그저 우리보다 조금 앞선 나라라고 생각했다. 뭐 그리 많이 앞선 나라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이 ‘조금 앞선 나라’가 아니라 ‘상당히 많이 앞선 나라’라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부터였다. 그 중 가장 절실했던 것은 공연시설이었다. 일본 소도시마다 있던 크고 작은 공연장이 더욱 그립고 부러웠던 것이다.

당시 극장 관계자가 내게 수없이 했던 말처럼 피카디리극장은 ‘공연장’이 아니라 ‘영화 상영관’이었다. 하지만 무대를 준비하는 사람으로서 타협을 하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나는 극장 관계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건 말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조건 몇 가지를 제시하고 관철시켜나갔다.

우선 대기실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영화관에 대기실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고민 끝에 창고처럼 쓰던 작은 방을 대기실로 사용하기로 했지만 지저분하기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아쉬운 대로 바닥을 청소하고, 벽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 달라고 했다. 찌들대로 찌든 냄새는 쉬 없어지지 않았다. 공기청정제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참다 못한 나는 향수를 갖고 와 한 병을 거의 다 뿌리고 냄새를 가려보려 했다.

창고를 급히 개조한 초라하고 남루한 대기실, 무대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의 시설이었다. 그래도 나는 공연 타이틀을 ‘패티 김 리사이틀’로 해 달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중가수의 공연은 ‘쇼’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클래식 음악의 전유물이었던 ‘리사이틀’이라는 명칭을 원했던 것이다.

‘패티 김 리사이틀!’

대중음악 가수의 이름을 건 한국 최초의 리사이틀, 내 이름을 단독으로 건 첫 공연, 그리고 우리나라 대중 앞에 내 모습을 선보인 무대인 것이다.

패티 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