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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링 카약의 세계, 싱싱한 봄 물살 헤치며 인생을 젓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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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25면

이내정(프리랜서 사진가)

투어링 카약

배는 푸르고 싱싱했다. 가평과 춘천을 가르는 가평대교 아래 자라섬 끝자락에 놓인 5대의 투어링 카약은 날씬하고 날렵해 보인다. 시트에 앉자마자 미끄러지듯 강물로 빨려 들어간다. 배는 민감하다. 북한강의 차디찬 물이 얇은 두께의 배 바닥을 통해 허벅지로 전달된다. 패들을 저어 본다. 미꾸라지가 진흙 속을 기어 나가듯 부드럽다. 배의 총무게는 15㎏ 남짓, 가볍기 때문이다. 뛰어난 감성만큼이나 균형감각이 필요할 듯하다. 패들링할 때 몸이 조금만 틀어지거나 좌우 어깨의 균형이 깨지면 배의 이물은 예민하게 반응한다.

이날 투어링은 베테랑 카야커들과 함께했다. 4년 전부터 국내에 폴딩(조립식) 카약을 보급하고 있는 조구룡(41)씨, 강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매주 투어에 나선다는 이호석(39)씨, 배낭여행을 통해 카약을 비롯한 다양한 레저를 섭렵한 윤승찬(39)씨, 그리고 아웃도어 전문 사진가 이내정(35)씨와 함께했다. 이들은 모두 ‘카약과 캠핑’ 동호회에서 활동한다.

투어링 카약의 패들링은 크게 어렵지 않다. 급류를 타는 래프팅은 노를 힘차게 저어야 하지만 투어링 카약은 스푼으로 아이스크림을 퍼 올리듯 가볍게 저어도 잘 나간다. 장비가 가볍고 물살을 잘 가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패들을 물에 넣을 때는 가볍게, 패들을 뽑을 때는 힘을 주는 게 추진력이 좋아진다.

카약 시트에 앉으면 수면과 시선은 거의 맞닿을 듯 가깝다. 강의 얼굴에 내려앉아 길과 들과 산을 올려다보는 것, 이것이 자동차로 여행할 때와는 전혀 다른 카야킹의 매
력이다.

“카야킹은 시트에 앉는 순간부터 혼자만의 시간입니다. 패들을 한 번 저을 때마다 들리는 철썩철썩 노 젓는 소리, 강물에 비친 카약과 나의 모습을 보며 혼자 조용히 노를 저어 가죠. 그래서 사람들은 카약을 인생에 비유해요.” 5년째 카약을 타는 조구룡씨의 카약 예찬이다.

황혼의 스퍼트

서둘지 않고 꾸준하게, 그러나 쉼 없이 노를 저어가는 투어링 카약의 패들링은 인생에 비유하자면 ‘황혼의 스퍼트’로 말할 수 있다. 실제 투어링 카약을 즐기는 사람도 20, 30대보다 중년층이 많다.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급류 카약에 비해 스릴과 모험 정신은 덜하지만 꾸준한 지구력과 근력을 요구하는 투어링 카약이야말로 인생을 저어 가는 패들링인 것이다.

투어링 카약이란 말 그대로 카약을 타고 여행한다는 뜻이다. 잔잔한 강이 많고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는 투어링 카약을 즐기기에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강이나 바다를 배 타고 여행하려면 도시락과 물이 필요하겠지만 그보다 먼저 튼튼한 배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투어링 카약은 전장이 길고 폭이 좁다. 오랜 시간 노를 저어야 하기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있는 날렵한 배가 필요하다.

오전 10시30분 자라섬을 출발한 일행은 청평댐을 향해 한 시간 정도 패들링을 한 뒤 경치 좋은 곳에 배를 대고 잔디밭에 앉아 점심 도시락을 꺼내놓았다. 미리 준비해 간 취사도구로 라면과 소시지를 구워 맥주를 한잔 곁들인다. 힘찬 패들링 후 거품 가득한 맥주 한잔, “캬”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다.

“이제 완연한 봄인데 다음주는 섬진강 벚꽃 구경 어떨까요?”

“벚꽃 구경 좋지요”

“벚꽃도 좋지만 섬진강 십 리 벚꽃 길을 가득 메운 인파를 구경하는 맛도 무시 못 하지.”

조구룡씨의 투어링 제안에 모두 대찬성, 다음주는 섬진강행으로 정해졌다. 북한강 주변의 산하는 겨울빛이지만 내리쬐는 햇살은 완연한 봄볕이다. 카약 장비를 받쳐놓고 강바람을 맞으며 먹는 점심, 일본의 유명 아웃도어 잡지 ‘비팔(Be-Pal)’에서나 보던 그 풍경을 만끽하는 순간이다.

부부 금실 척척

강둑에서 점심을 먹는 사이 청평댐 쪽에서 2인승 투어링 카약이 쏜살같이 남이섬을 향해 달려간다. 손짓·발짓으로 신호를 보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배를 대게 했다. 알고 보니 두 사람 모두 카약과캠핑 회원들이다. 장정기(40)·박명제(39)씨는 주말이면 카약을 싣고 투어를 떠나는 부부 카야커. 이날은 가평군 설악면 사룡리를 출발해 남이섬 근방까지 약 20㎞를 타고 내려왔다. 남이섬을 돌아 다시 숙소인 사룡리까지 돌아간다고 하니 무려 하루 40㎞를 젓게 되는 셈이다.

“지난해부터 집사람과 카약을 타고 있는데, 2인승을 같이 타니까 호흡이 척척 맞고 부부 금실도 좋아져요. 사실 처음에는 배가 앞으로 안 가고 자꾸 비뚤비뚤 가 와이프한테 화를 내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그러더군요. 제 잘못이었던 거죠.”

장정기씨는 따로 카야킹을 배운 적은 없지만 남들 타는 것을 눈여겨보면서 자연스럽게 패들링을 익혔다. 지금은 시속 7~8㎞를 달리는 베테랑 카야커다.

“살을 빼려고 시작했는데, 사실 다이어트에는 크게 도움이 안 되네요. 패들링이 너무 힘드니깐, 배에서 내려 막 먹게 되거든요. 그래도 남편이랑 한 배를 타면서 주말을 보낸다는 게 너무 즐거워요.”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차에 배를 싣고 1박2일이나 2박3일 코스로 투어를 떠난다고 한다.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강물을 따라 코스를 답사한 뒤 펜션에서 한 밤 묵고 다음날 아침 투어를 나선다. 두 사람이 직접 지도를 보며 투어 코스를 짜고, 둘이 같이 땀 흘리는 게 카약의 매력이란다.

오후의 패들링은 부부 카야커가 합세해 총 여섯 대의 카약이 북한강에 투영된 은빛 햇살을 받으며 나아갔다. 카약은 드넓은 한강 한가운데서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비늘을 가르며 헤쳐 나간다. 은빛 물살에 떠 있는 총천연색 카약이 강물을 수놓는다. ‘처얼썩~처얼썩~’ 또다시 혼자만의 세상에 젖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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