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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은영의 DVD세상] '토끼 울타리 S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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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면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길을 걸어가는 세 소녀. 쉬어갈 그늘 하나 없는 황량한 길, 길게 늘어선 토끼 울타리를 따라 세 소녀는 걷고 또 걷는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아픈 다리를 추스르며 서로를 부축해 무려 9주에 걸쳐 2400km의 거리를 맨발로 걸어간 소녀들. 그들의 기나 긴 여정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리운 고향,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호주에서 할리우드로 이주한 뒤 '패트리어트' 같은 대중영화를 만들어 온 필립 노이스가 오랜만에 고향 호주로 돌아와 선보인 저예산 독립영화 '토끼 울타리'는 집을 찾아 길을 나선 세 소녀의 용감한 여정을 담는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인간승리의 드라마는 아니다.

감독은 소녀들의 험난한 여행길을 통해 호주의 잊혀진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을 담고자 한다. 1930년대 호주의 기득권층인 영국 백인은 흑인의 피를 정화하고 문명화한다는 미명 아래 백인과 흑인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를 분리, 수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호주 북부의 외딴 사막마을 지갈롱에서 살던 몰리와 데이지, 그리고 사촌 그레이시 역시 이 왜곡된 인종 차별 정책에 따라 원주민 보호소에 강제 수감됐다. 하지만 그들은 영혼의 자유와 집을 찾아 보호소를 탈출해 험난한 여정에 나서게 된다.

사실 백인 남성인 감독이 원주민 흑인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주인공들의 고통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그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의심 어린 시선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DVD의 부록으로 수록된 감독의 해설을 듣노라면 이러한 생각 역시 또 다른 편견임을 깨닫게 한다. 감독의 해설을 중심으로 몰리의 실제 딸이자 원작자인 도리스 필킹톤 가리마라, 시나리오를 쓴 크리스틴 올센, 음악의 피터 가브리엘 등 제작진의 육성을 가미한 해설은 그만큼 신실하다. 어느 정도 성공한 흥행감독이지만 결국은 할리우드의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감독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백인 중심의 식민 정책 속에 타자가 돼버린 호주 원주민들에 대한 관심과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토끼 울타리'는 상당히 이중적인 의미다. 반대편 농지에 토끼가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 울타리인 '토끼 울타리'는 백인과 흑인을 나누고 구분 짓는 경계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몰리와 데이지는 그 '토끼 울타리'를 따라 마침내 집에 다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끼 울타리'는 그들을 세상과 분리시키는 경계지만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애너모픽 1.85대 1의 화면비와 돌비 디지털 5.1을 지원하는 DVD는 일견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음성해설과 더불어 40분가량의 제작 다큐멘터리는 다른 어떤 화려한 부록보다도 진실한 감동으로 가득하다. 호주 오지를 샅샅이 뒤져 찾아낸 세 명의 소녀들은 자유를 찾아 백인들이 만든 규칙과 문명을 박차고 나선 70년 전 소녀들 자체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감각적인 촬영 역시 '긴 여정의 고통과 외로움.고립감.고통스러움을 그리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고통스럽지만 희망적인 소녀들의 여정을 풍부하게 담아낸다. 도일은 호주 출신이지만 흥미롭게도 이 영화는 그가 호주에서 촬영한 첫 번째 영화다. 몰리와 데이지가 토끼 울타리를 따라 사막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듯 감독과 도일 역시 이 영화와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온 셈이다.

***요 대사

집요하게 몰리 일행을 쫓던 개코 무두. 그 역시 백인에게 정체성과 딸을 빼앗긴 호주 원주민인 그. 내면에 분노를 가득 안고 있지만 이미 너무 길들여진 그는 몰리 일행이 걸어갔을 사막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뿐이다. “만만찮은 아이입니다. 집으로 가려는 거지요.”

***조 장면

집으로 향한 여정 속에 몰리와 데이지는 마침내 삭막한 사막 한 가운데에서 쓰러진다. 가물가물 사라지는 의식 속에 몰리는 문득 고향 하늘을 자유로이 날던 ‘영혼의 새’를 보게 되고 다시금 결연히 일어나 집을 향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모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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