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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스타일] 촌티나는 손목시계, 유치해서 유쾌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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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돌고 돈다지요. 패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기하게도 패션의 유행은 돌고 도는 것 같습니다. 우리네 삶의 환경이 옛날과 많이 다름에도 말이죠. 제가 중학교 때 어디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게 기억납니다. “패션 유행 사이클은 20년이다.” 진짜 신기합니다. 딱 20년 만에 1980년대 최고의 ‘꽃미남 밴드’였던 소방차의 그 승마바지가 많은 디자이너에 의해 재해석되고, 눈 시린 형광색이나 어지러운 기하학 프린트가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왔으니까요. 저도 요즘 미니멀리즘이 강세였던 90년대의 패션 리더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촌스러운 패션 아이템들에 눈이 많이 갑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만화가 그려진 전자시계를 갖고 싶어서 부모님과 얼마나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시계 유리에 금이 가게 만들고, 결국은 학교 수돗가에 풀어놓고 와 버렸죠. 요즘 부쩍 제 어린 날의 ‘은하철도999 캐릭터 만화시계’ 같은 디자인의 손목시계에 눈이 가고 마음이 갑니다. 지금 갖고 있는 시계, 80년대 패션만큼이나 유치하고 뻔뻔한 분위기의 금색 카시오 데이터뱅크는 시차가 나는 해외 출장에서 빛을 발합니다. 한동안 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에게 꼭 부탁할 만큼 인기있었던 모델이죠. 값비싼 수동 손목시계에는 없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녹색으로 빛을 내거든요. 스톱워치뿐 아니라 메모도 가능합니다. 이 정도면 제가 왜 전자시계를 좋아하는지 아시겠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근 수입 패션브랜드로 가득한 백화점 매장에 디즈니 캐릭터를 이용한 리미티드 에디션 손목시계(사진)가 나오자마자 품절됐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유치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닌가 봐요. 현대인에게는 시간을 확인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일 때가 많죠. 어차피 꼭 시계를 봐야 한다면 손목을 볼 때마다 기분이 유쾌하면 좋겠지요. 우중충하고 지루한 금속 시계와 다른 기분 말입니다. 매일 차지 못한다면 주말 동안만이라도!

하상백(패션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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