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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묻지마’ MB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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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A를 준비하는 이들이 빼곡한 학원강의실, 화이트보드에 쓰여진 어지러운 기호들이 이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닮았다.

정○○씨. 34세 사업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비즈니스를 합니다. 버젓한 미국 학위 없이 사업을 끌어가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답니다.

이XX씨. 28세 엔지니어. 공대를 나온 뒤 외국 기업에서 3년 일했습니다. 이공계의 미래는 ‘뻔하다’며 고민입니다. 잔소리하는 상사, 권위적인 회사 분위기도 마음에 안 든다네요.

심△△씨. 39세 회사원. 10년 넘게 대기업에서 몸바쳐 일했습니다. ‘우수 직원’으로 표창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흔을 앞둔 지금 심란하답니다. 10년 후면 ‘명퇴 대열’에 오르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직업도, 전공도, 나이도 다른 이들이지만 목표는 같습니다. 바로 해외 경영대학원(MBA)에 진학하는 것입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MBA. 요즘은 ‘MBA 폐인’까지 생겼다죠. MBA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엔 그러나 만만찮은 그늘이 있습니다. week&이 알아봤습니다.

글=홍주연·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아낌없이 쓰련다”

누구나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꾼다, 하지만 미래는 실제로 발을 내딛는 이의 몫이다 (사진 모델=MBA 전문 컨설턴트 이동구씨).

MBA에 들어가기 위한 지원자들의 노력은 ‘고시 열풍’ 뺨친다. 공부를 위해 직장을 관두거나 재수·삼수에 나서는 지원자도 수두룩하다. 일부는 학원비·번역비 등에 수천만원을 쓰기도 한다. ‘MBA 폐인’‘MBA 고시생’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미국 공인회계사(AICPA) 김모(35)씨는 ‘MBA 삼수생’이다. 그는 2004년부터 경영대학원입학시험(GMAT)을 준비해 4년 넘게 MBA에 매달리고 있다. 그는 2005년 말 ‘톱10’ 학교에 지원해 모두 탈락했고 지난해에는 3개 학교에 최종면접까지 갔으나 대기자 명단에 오르는 것에 그쳤다. 올해는 눈을 낮춰 20위권 대학에 지원서를 냈다. 그는 “직장에서 일찍 퇴근하는 것이 눈치 보여 회사도 옮겼다. 주말에도 새벽같이 도서관에 가느라 가족들과 밥 한끼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회사원 이모(34)씨는 2년여 동안 MBA를 준비하며 2000만원을 썼다. GMAT 학원을 다니는 데 200만원, 에세이 컨설팅 500만원, 번역비 500만원이 들었다. 지난해 말 10개 학교를 지원하면서 전형료만 250만원을 썼고 지난달에는 학교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 비행기값 200만원을 들여 대학을 찾아갔다. 이씨는 “MBA를 마치는 데 2억원 정도 쓸 것으로 예상한다.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해 조금 더 투자하는 것이 아깝지 않다”며 “어떤 사람은 대학 관계자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비행기값만 1000만원 넘게 썼다더라”고 말했다. 한 GMAT 학원 강사는 “회사를 그만두고 1년 넘게 도서관을 다니며 시험 준비하는 사람들도 수백 명”이라고 귀띔했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전문 서비스도 생겨났다. 지원자들은 MBA에 지원하기 위해 GMAT와 토플을 본 뒤 에세이를 쓰고 인터뷰를 해야 한다. 과정별로 이를 전문적으로 도와주는 업체 20~30여 곳이 성업 중이다. MBA 준비생들을 위한 독서실·공부방도 5~10곳 있고, ‘인터뷰 과외’도 인기다. 업계 관계자는 “MBA 사교육 시장은 연간 수십억원 규모”라며 “지원자들의 불안한 마음을 노리고 터무니없이 비싼 돈을 받는 업자도 많다”고 말했다. 올해 10위권 이내 학교 8개에 지원한 박모(27)씨는 “굳이 돈을 들여 에세이를 검토받아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보다 뒤처질 수 없다는 생각에 600만원을 주고 컨설팅을 받았다”고 말했다.

“나도야 간다”

전문가들은 ‘MBA 열풍’이 이미 도를 넘었다고 말한다. 업계에서는 매년 3000~5000명의 지원자들이 MBA 시장에 새로 뛰어드는 것으로 분석한다. 경제 규모와 인구에 비해서도 한국인들의 MBA 열기는 유난하다. GMAT 주관사인 ‘지맥(GMAC)’에 따르면 2006년 7월부터 2007년 6월까지 모두 6811명의 한국인이 시험에 응시했다(중복 응시 포함). 이는 미국을 제외하고 인도(2만1481명)·중국(1만3048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숫자다.

그러나 세계 50위권 이내의 MBA에 가는 한국인은 1년에 500여 명 안팎이다. 하버드·스탠퍼드·와튼 등 소위 ‘톱10’으로 불리는 10여 개 대학에는 해마다 한국인 150여 명이 입학한다. 미국 영주권자를 제외하면 토종 한국인 수는 이보다 줄어든다. 지원자들은 ‘톱10’에 가기 위해 많게는 50 대 1, 적게는 20 대 1의 경쟁을 뚫어야 한다.

‘톱10’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억대 연봉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전략 컨설팅, 투자 은행, 일부 미국 기업 등 MBA 졸업생에게 억대 연봉을 주는 연간 50~80명의 한국인을 뽑는다. 헤드헌팅 회사인 엔터웨이파트너스 김수미 팀장은 “매년 MBA 졸업자들은 수백 명 쏟아져 나오지만 취업 수요는 한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현실은 바늘 구멍 뚫기보다 어렵지만 지원자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본지가 취업 정보업체 커리어(www.career.co.kr)와 15~17일 직장인 198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4명 중 1명(24.9%)이 “MBA를 준비 중이거나 준비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잘 모르겠다”와 “MBA 계획이 없다”는 답변은 각각 29.5%, 45.6%였다. 특히 30~40대 직장인 중 MBA에 뜻을 두고 있는 사람은 전체의 28.7%로 20대(21.2%)보다 많았다.

문제는 ’묻지마 지원’

2008년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왜 MBA에 목을 매는 것일까. JC MBA 정병찬 대표는 “지원자의 절반 이상이 직장에 만족하지 못해 MBA를 가려는 현실 도피형이라고”고 말했다. 공대를 졸업한 뒤 10년 동안 연구원으로 일한 이모(36)씨도 같은 이유로 MBA 지원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불합리한 조직 구조와 상사의 닦달에 지쳤다. 엔지니어의 길 대신 고액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금융업으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다. 학벌을 올리기 위해 MBA를 꿈꾸는 사람도 있다. 보험회사에 다니는 신모(29)씨는 “소위 SKY대를 나오지 않은 것이 승진에 장애가 되었다. 명문 MBA 졸업장을 따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본지 설문조사에서는 MBA를 계획하는 이유(복수 응답)에 대해 응답자의 38.7%가 “전문적인 지식을 쌓고 싶어서”라고 답했고, 24.7%가 “막연한 미래가 불안해서”라고 답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18.5%),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17.0%)란 답이 그 뒤를 이었다.

문제는 이 같은 이유로 지원한 사람의 합격률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MBA 컨설턴트 겸 박정어학원 강사 이동구씨는 “사람들은 MBA를 대학입시나 고시처럼 공부만 잘하면 간다고 생각한다”며 “‘종합 인간 평가’에 가까운 MBA 전형에서 이런 사람은 대부분 탈락한다”고 말했다. 미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의 입학 면접관으로 일했던 한 졸업생은 “면접에서 대부분 지원자들이 ‘돈을 벌고 싶어서’‘새로운 일을 하고 싶어서’ 지원한다고 답한다”며 “심지어 학교 선생님을 하다 MBA에 지원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졸업생은 “MBA는 이전 직장과 미래 계획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 비전이 없는 ‘묻지마 지원자’는 다 탈락시킨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불안정한 직업 환경과 학력 인플레를 MBA 열풍의 원인으로 꼽았다. 한상린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는 “평생 직장이 없어진 상황에서 젊은 직장인들은 더 나은 경쟁력과 학벌 간판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장은 “요즘 젊은이들은 죽기살기로 직장에 들어가고 죽기살기로 직장에서 나오려고 한다”며 “2030 직장인들은 과중한 업무와 수직적 조직 구조의 탈출구를 MBA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MBA 하시게요? 전문가들의 한마디

이동구 (MBA 컨설턴트 · 박정어학원 강사)
자신만의 상품성을 키워라

올해 지원 상황을 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외국 경험이 있고, 봉사·취미 활동으로 경력을 관리한 지원자들은 3~5개 학교에 합격한다. 하지만 점수와 학벌만 내세우는 지원자들은 20위권 학교에 모조리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아시아인 쿼터를 놓고 중국·인도 지원자들과도 경쟁해야 한다. 한국인이 명문 MBA에 들어가는 것은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3~4년 전에 무난히 ‘톱10’에 합격할 사람이 요즘은 20위권으로 내려가야 붙는다.

톱 스쿨에 합격하려면 MBA에서 원하는 ‘상품성’을 길러야 한다. 이는 취업 시장에서 경쟁력일 수도 있고 인격적 성숙이나 다양한 경험일 수도 있다. 세계 명문 대학은 ‘배울 점이 있는 학생’을 뽑고 싶어한다. 지원자들은 자신의 독특한 상품성을 찾아 에세이와 인터뷰를 통해 잘 전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를 충분히 고민한 뒤 MBA 준비에 뛰어들어라. 초보 지원자의 경우 영어회화 연습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좋다. 대학생이라면 봉사·과외활동 등 폭넓은 경험을 갖춰야 한다.

정병찬(JC MBA 대표)
Why MBA? 스스로에게 물어봐라

MBA에서 지원자를 평가하는 기준은 세 가지다. 직업, 학업 능력, 인간적 성숙도가 그것이다. 직업은 지원자의 이력서와 지원서를, 학업 능력은 GMAT·토플·학점 등으로 측정한다. 인간적 성숙도는 지원자의 철학과 관심사를 담은 에세이와 인터뷰로 평가한다. 대부분의 지원자가 GMAT 700점만 넘으면 톱 스쿨에 갈 것으로 생각한다. 요즘은 세 가지 부문에 골고루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과외활동 경험이 적거나 영어회화 실력이 부족해도 입학이 힘들다.

나는 지원자들에게 ‘왜 MBA가 필요한지(Why MBA)’에 대해 자문하라고 조언한다. 목표 없이 준비하면 GMAT에서 고득점을 받고도 탈락하는 경우가 많다. MBA 입학담당관들은 인간성과 성숙도 역시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회적 책임을 완수할 봉사활동 등에도 공을 들여라. 자신이 30대 중반 이후라면 해외 MBA 대신 국내 MBA나 CFA 등 자격증 취득을 고려하라고 충고한다. 현실적으로 명문 MBA에 합격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대학생이라면 학점 관리에 집중하고 창업·여행 등 새로운 일을 시도하라고 권한다.

함철주(www.gmatstudy.com 대표)
영어는‘기본 중의 기본’이다

최근 두드러진 특징은 GMAT의 변별력이 약해졌다는 점이다. 5~10 년 전에도 700점을 넘으면 ‘톱10’에 합격했다. 지난해에는 700점 이상 받으면 20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올해는 점수가 높아도 20위권 대학에 전부 떨어지는 일이 많다. 특히 750점 이상 고득점자도 모조리 탈락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대학에서 시험 점수는 기본으로 생각하고 경력·에세이 등을 까다롭게 심사해 지원자를 뽑는 것 같다.

토플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토플 시험이 인터넷응시제도(IBT)로 바뀌면서 상당수의 지원자가 애를 먹는다. GMAT 공부 전에 영어 기본기를 길러야 토플 점수도 쉽게 딸 수 있다. 평소 영국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등을 읽으며 잘 쓰인 영어 글을 많이 읽어라. 시험을 잘보기 위해서는 논리력·사고력도 중요하다. 영어 잡지를 읽으며 이를 비판적으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습관을 길러라. 영어 기본기가 약하다면 단어 공부부터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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