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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매출 3억인데 원료값 석 달간 1억 올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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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외환위기 때는 빚 없이 경영했던 건전한 회사들은 어렵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의 뛰는 원자재 가격엔 당할 재간이 없어요.” 인천 남동공단에서 간장병 등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업체인 삼진성형의 김종호(51) 사장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지난해 상반기 t당 120만원 하던 폴리에틸렌(PE) 가격이 지난달 155만원으로 올랐다. 지난해 9월 이후 매달 5만원씩 오르는 중이다. PE의 원료인 나프타 값이 뛰고 있기 때문이다. 매출이 월 3억여원인 이 회사는 석 달간 원료 값으로만 1억원을 더 썼다고 했다.

이를 만회하려면 간장병 한 개당 납품 가격을 300원씩 더 올려야 한다. 그런데 간장공장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대두 값이 올라 제품 가격을 올려야 하지만 정부가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손해 보면서 병 값만 올려 주기도 힘들다는 반응이다.

“그저 상황에 끌려갈 뿐이다.” “앞에선 일하고, 뒤로는 밑진다.” 기업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멈출 줄 모르는 원자재 가격 폭등에 기업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기업 간 ‘네 탓’ 공방=나프타가 몰고 온 어두운 그림자는 길었다. 17일 찾았던 울산시 고사동의 SK에너지 울산컴플렉스. 파이프라인이 어지럽게 늘어선 유화공장엔 ‘정지 중’이란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나프타를 가공하는 공장이다. “오프닝 수치가 모두 마이너스입니다. 가동을 안 한다는 거죠.” 이덕우 아로마틱 생산1팀장의 말이다. 그는 “입사 24년 만에 처음 보는 일”이라고 했다. 올 초 t당 700달러 하던 나프타 가격이 최근에는 900달러대로 뛰면서 관련 공장 4곳 중 3곳이 가동을 중단하거나 감산을 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원료 가격이 뛰어 제품 값을 올렸더니 이번엔 다른 유화업체에서 아우성이다. SK에너지에서 에틸렌을 공급받는 동부하이텍과 한국바스프가 ‘가격을 지나치게 올렸다’며 공정위에 이 회사를 제소하겠다고 나섰다.  

주물업체와 레미콘업체의 생산 중단도 좀체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경북 김천에서 자동차 주물 부품 공장을 운영하는 변재욱 대한특수금속 사장은 “지난해 9월부터 공장을 돌리면 적자였지만 그래도 버텼다”며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17일부터 생산 중단에 동참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이 납품가를 올려 주지 않으면 우린 진짜로 다 죽는다”며 “기업 하던 사람들이 오죽하면 머리띠를 매고 길거리에 나섰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가격도 못 올리고 속앓이=부산 사하구의 자동차 부품업체들은 요즘 속앓이 중이었다. 이곳 업체들은 주로 동선이나 특수강으로 금형을 만들어 현대·기아차나 GM대우차에 납품한다. 금형업체를 운영하는 정모 사장은 “일주일 새 동선은 ㎏당 1100원, 특수강은 250원이나 뛰었다”며 “그나마 원료를 구하기도 힘들어 외상은 꿈도 못 꾸고 전액 현금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정이 이런 데도 가격을 올려 달라고 하면 거래처를 바꾸겠다고 할까 봐 납품업체인 GM대우엔 말도 못 꺼내고 있다”고 했다. 현대차에 부품을 납품하는 박모 사장은 “자동차 회사가 최근 협력업체들의 원가 상승 요인을 조사하고 있다”며 “그런데 이게 납품 가격을 올려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구매처를 돌리려는 사전 작업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입도 못 떼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하지만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협력업체의 주장을 다 들어주면 결국 소비자 가격을 올려야 하는데 요즘처럼 정부가 물가 인상을 단속한다는 판에 그 뒷감당을 누가 하느냐”고 반문했다.

◇정부에 대한 불신감 표출도=닭고기 생산업체들은 최근 공정거래위원회에 ‘가격 담합을 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평소 같으면 공정위가 가격 담합을 적발해도 강하게 부정하던 업체들이 먼저 담합을 하겠다고 공개 선언한 것이다. 김태경 한국육가공협회장은 “정부가 가격만 묶어두면 오른 사료값은 어디 가서 보전을 받느냐”며 “생산 원가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터달라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주장했다. 자동차부품 업계도 정부의 대책에 강한 불신감을 드러냈다. 부산자동차부품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철강 유통사들이 창고를 빌려 원자재를 쌓아놓았다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정부는 사재기를 단속한다며 철강회사 본사만 뒤지고 다닌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양선희·장정훈·이철재·손해용·한애란 기자(이상 경제부문),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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