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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뭘 하라는 명령이 없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개정된 정부조직법이 지난달 29일 정식 발효됐다. 작은 정부를 위해 정부부처를 통·폐합하고 공무원 수를 줄인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하지만 통·폐합 대상 부처들의 업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통신과 해양수산 분야 업무는 사실상 ‘정지’ 상황이다. 정부조직 개편을 주관하는 행정안전부는 구체적인 방안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해양수산부 출범 12년 만에 이런 날벼락은 처음입니다.”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차그룹 사옥 9층에 위치한 해수부 대회의실에는 국토해양부(정부 과천청사)로 옮겨야 할 짐과 폐기해야 할 문서가 잔뜩 쌓여 있다.

해수부에서 15년가량 근무했다는 한 직원은 이번 정부조직 개편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 시절 항만청과 수산청, 환경부의 해양환경 부문이 합쳐져 해수부가 탄생할 때만 해도 이런 혼란은 없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통·폐합 때도 안팎으로 시끄러웠던 것은 지금과 똑같지만 담당 업무, 부서 배치 등 인사 문제는 대부분 결정되고 해수부가 설립됐다는 것이다.

그는 국토해양부로 가는 것으로 결정됐다. 그 외엔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소속 부서도 모른다고 했다. 이런 불만을 토로한 그는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쉰 뒤 이내 책상 짐을 박스로 옮기기 시작했다.

현재 해수부의 업무는 ‘올 스톱’ 상태다. 대부분 책상의 전화선과 컴퓨터 전원은 뽑혀 있다. 일부 직원의 법인카드, 출입증도 반납된 상태다. 해수부에서는 더 이상 처리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국토해양부에서 현재 해수부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담당자들은 대부분 아직 해수부에 있다.

한 간부는 “우리 부서에서 추진하는 국가 R&D사업이 6개나 되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해수부 R&D사업을 추진 중인 한 중소기업은 “3월 말까지 받을 지원금이 있는데, 지난주부터 담당자와 연락이 안 된다”며 불만을 나타냈다.

현재 해수부에는 항행안전정보팀의 컴퓨터 3대만 전원이 켜져 있다. 이것이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자동차그룹 사옥에 위치한 해수부의 현재 모습이다.

해수부는 이 빌딩 8, 9, 10층을 쓰고 있다. 전 층이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각 층 복도에는 문서를 담은 박스가 잔뜩 쌓여 있으며 9층 대회의실에는 폐기해야 할 책과 문서가 널브러져 있다. 지난달 29일 퇴임한 강무현 장관의 집무실은 굳게 잠겼다.

해수부는 지난 11일부터 이사를 시작했다. 14일께 모든 이사가 완료된다. 해양과 항만 부문은 국토해양부로, 수산 부문은 농수산식품부로 이전이 결정됐다. 연일 택배 업체와 이사 업체 직원들이 드나들며 정부 과천청사로 각종 기기와 짐을 빼고 있다.

한 사무관은 “다음주부터 사무실을 옮겨도 업무가 정상화될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감축 인원에 포함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건설교통부는 지난달 국토해양부로 다시 태어남과 동시에 전 직원 4000여 명 중, 600여 명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현재 해수부 본부에서 국토해양부로 가기로 결정된 인원은 350여 명. 처음 허용 인원보다 60여 명 많은 상태다.

하지만 전부 국토해양부 소속 직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대기자 명단에 포함된다. 이들은 다른 부서 발령을 기다려야 한다. 대기자 명단 포함자 중 계약직은 6개월, 정규직은 최대 2년 동안 아무런 보직을 받지 못하면 다른 직장을 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몇 1급 공무원은 “도저히 못해 먹겠다”며 다른 일을 알아보고 있다고 한다.

해수부와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정보통신부 업무도 거의 마비 수준이다. 정통부는 지식경제부와 문화관광체육부, 대통령 직속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로 쪼개진다.

현재 정통부 관련 업무는 방통위에 가기로 한 직원 일부만 하고 있다. 이들은 이 건물 14층 한쪽에 운영지원과라는 가상 팻말을 붙이고 정통부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사무실 재설비, 전화 받기 등 기본적인 업무만 하고 있는 것이다.

정통부의 핵심 업무였던 정보통신(IT) 부문은 현재 지식경제부에 떼어준 상황. 지경부로 간 한 직원은 “장관 업무보고, 부서 분위기 파악 등으로 3월이 지나야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더구나 현재 방통위는 위원장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리더가 없으니 조직이 나가야 할 방향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결과. 최시중 내정자의 임명이 일러야 19일께 결정된다. 방통위 직원들은 앞으로 10일은 더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17일로 예정돼 있는 국회 인사청문회를 최 내정자가 통과하지 못한다면 정상적인 업무의 시작을 가늠할 수 없다.

정통부에 20년가량 몸담았다는 한 직원은 “94년 체신부에서 정보통신부로 바뀔 때만 해도 국가발전 전략산업(정보기술)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생각이 들어 업무에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하며 “한동안 고향(정통부)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쉽게 일이 손에 안 잡힐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행안부 “3월 말께 정상화될 것”

정통부에 몸담았던 직원들은 “우~ 코리아”라는 말을 농담으로 한다. 14층 대회의실에 걸려 있던 ‘IT839로 U-KOREA 실현’이라는 팻말을 변형해 이번 정부조직 개편을 비꼬는 의미다.

정통부 주변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한 주인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에 소주가 팔리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보통 소주 10병 이상 판다”며 답답한 이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방통위로 소속을 옮겨야 하는 방송위 직원들도 하릴없이 짐만 잔뜩 쌓아놓은 채 시간만 보내고 있다. 새로운 정부조직법에 따라 지난달 29일 방송위가 폐지됐기 때문에 지금은 할 일이 없다. 방송위는 방통위와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합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 나뉘었다.

전체 정원 206명 중 75%가량이 방통위로 갈 예정이다. 정확한 인원은 정해지지 않았다. 이 역시 위원장이 임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전부 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소속이 된다. 현재 이 조직도 직제나 규모가 최종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한 관계자는 “81년 탄생한 방송위가 많은 일을 겪으며 변화해 왔지만 이번처럼 아무런 대책 없는 조직 개편은 처음”이라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밖에 교육부가 있는 정부세종로 청사로 자리를 옮긴 과학기술부도, 문화관광체육부로 통합된 국정홍보처도 이번 주 내내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대표전화도 안 받았다.

이번 조직개편을 총괄한 행정안전부 측은 “아직 인력 재배치 등 세부사항이 정해지지 않은 점을 시인한다”며 “늦어도 3월 말까지 각 부처 업무를 정상화해 불편을 최소화하겠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 답변도 기자가 행안부 여러 부서를 돌며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들을 수 있었다. 조직개편을 총괄한다는 행안부조차 자신들 조직개편을 마무리하지 못해 허둥대고 있는 것이다.

작은 정부를 위한 조직개편은 필요하다. 그러나 치밀한 로드맵을 가지고 계획성 있게 추진해야 누수를 막을 수 있다. 보름 넘게 공직자들이 일손을 놓고 있는 것은 또 다른 예산낭비다. 더욱이 해당 부처와 협조가 안 돼 일을 할 수 없는 기업이 많을 텐데 그 피해는 또 누가 보상할 것인가?

최남영 기자 hinews@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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