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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즐거운 상상 '사직 프로젝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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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사직 프로젝트'가 뭔지 알아?"

오랜만에 만난 화가 김점선씨가 예의 툭 던지듯 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국민의 정부시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청와대의 사직동팀이라면 혹 모를까, 사직 프로젝트라니? 국민은 뒷전이요, 나라야 어찌 되든 이전투구식 정쟁으로 지고 새는 이 나라이니 또 어떤 쪽에서 몰래 벌인 정치 스캔들인가? 바보처럼 멀뚱멀뚱 눈만 굴리는 나에게 金씨는 열정적으로 '동화 같은 얘기'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암울했던 유신시절, 청소년들과 젊은 엄마들을 주 독자로 삼아 쓴 박완서씨의 글들이 1979년 샘터사에서 동화집이라 이름붙여 선보였다가 세월이 흐르며 절판됐었다. 그 일부에 새 동화를 보태 '보시니 참 좋았다'(이가서 간행)로 새로 내놓는데 책에 그림을 담는 몫이 金씨에게 주어졌단다. 함께 일하던 어느날 朴씨가 "우리 함께 집을 지어 살면 어떨까?" 하더라는 것이다.

공동작업을 한 이 책의 인세를 적립해 한 사람은 땅을 사고, 한 사람은 집을 짓는 명목으로 비용을 충당해 함께 산다는 야심에 찬 '노년 프로젝트'였다. 6~10평 남짓한 서민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울 사직동은 朴씨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데다, 시내에서 가까우며 서울의 옛 정취를 맛볼 수 있어 이곳에 4층집을 지어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골자였다.

둘이 사는데 웬 4층? 그러나 나의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시인 조은.김순자씨 등 미혼인 30대 여성 두 사람도 함께였던 것이다. 음식 솜씨 좋은 조씨는 식탁을 맡아 식구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문단의 어른인 朴씨는 어른동화작가를 꿈꾸는 김순자씨를 지도해주며, 넷 또는 두셋이 공동작업으로 책을 내거나 시화전을 열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예술 프로젝트라는 설명이었다.

여성 예술인들의 공동체 생활이라-.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 들거나 젊거나 간에, 남성이건 여성이건 상관없이 독신자들이 가장 괴로운 일로 꼽는 것이 '혼자 밥 먹기'다. 그나마 젊거나, 남성이라면 아침을 제외한 두끼는 그래도 해결하기가 어렵지 않다. 사회적 네트워크가 촘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 들고, 그것도 여성이라면 한끼나마 같이 때워줄 사람이 아쉽다. 게다가 불규칙한 식사는 약해져 가는 건강을 더욱 재촉하니 문제다. 한데, 한 집에 살아도 층을 달리해 자유를 보장하면서 공동식탁으로 이를 해결하니, 묘수는 묘수였다. 더욱이 30대, 50대, 70대로 여러 세대가 한데 어울려 있어 지혜와 건강을 서로 빌릴 수도 있으렷다! 이거야말로, 일하는 여성들이 만들어내는 신개념의 확대가족이 아닌가. 혼자 사는 여성들이 늘고 있지만 사회의 인습과 제도는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어 홀로 살아가기엔 여전히 힘든 현실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근사한 대안이라고 무릎을 쳤다.

그러나 책 한권에 고작 작가는 800원, 화가는 300원씩 적립하는 쌈짓돈만으로 1억여원의 비용을 충당하겠다는 계획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동화'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초판을 발행한 지 채 한달도 못돼 6쇄에 들어갔다는 낭보를 전해듣던 날, 나는 잊고 있던 '사직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행복했다며 뇌리에서 지워버린 그 프로젝트가 느리지만 착실하게 한발씩 내딛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무섭게 변하고 있다. 여성들이 꿈꾼 확대가족공동체를 현실에서 맞닥뜨리게 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홍은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