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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칼럼

대장과 척후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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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진지 깊숙이 침투해 동태를 살피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척후병의 임무다. 자칫 실수라도 저지르면 저격수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기에, 척후병으로 지목되는 병사는 무사귀환을 조상에게라도 빌어야 한다. 소대전투에서는 상병이, 중대전투에서는 중사가 척후조를 맡고, 대대전투라면 위관급 장교가 나선다.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로멜은 작전사령부에서 척후조의 보고를 기다렸고, 전차전 명장인 패튼도 직접 전차를 몰고 나가지는 않았다. 대장의 역할은 작전본부에서 올라온 판단을 종합해서 전략을 짜고 실행을 명하는 것.

그런데 이 정부에서는 대통령도 뛰고, 장관도 뛰고, 실장과 국장도 뛴다. 척후병인 것이다. 취임 초기인 만큼 대통령이 재래시장에 자주 나가서 반찬값과 우동값을 체크할 수는 있겠다. 서민경제를 체감하라고 대통령이 ‘현장주의’를 강조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장관이 건설현장에 가고, 국장과 실장은 대형마트로 가서 물가동향을 살피는 모습은 어쩐지 어수선하다. 말단 공무원과 주사가 뛰는 것은 사리에 맞지만, 작전참모들이 전방까지 진출해 척후를 하면 종합판단은 누가 하고 미래경제의 밑그림은 누가 그리는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한 정보대령은 산발적 암호들을 해독해 진주만 공습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이미 하와이에 접근한 일본함대가 350대의 전투기를 발진시킨 후였다.

마치 경제정부의 실력을 테스트하겠다는 듯, 악재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있다. 곡물가격 앙등이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을 이미 촉발했고, 인상된 원자재 가격은 산업 전반에 비상사태를 불러왔다. 레미콘·철근·핫코일은 웃돈을 줘도 물량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고, 급등한 나프타 가격이 아스콘·플라스틱 업계에 치명타를 안겼다. 여기에 경상수지 적자, 금융 불안이 겹쳐 한국 경제를 벼랑으로 몰고 있다. 그런데 대통령이 ‘전봇대!’라고 하면 전봇대 찾아다니고, ‘물가!’라고 하면 유류세 인하, 매점매석 단속, 공공요금 억제 등 척후병이나 내놓을 전통메뉴를 나열한다면 그게 어디 ‘경제정부’의 위상에 맞는가 말이다.

모든 신경이 공천에 쏠려 있어서 그런지, ‘사실상 백수가 300만’이라는 뉴스가 별로 충격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2년 전, 독일은 ‘실업자 500만’이라는 보도에 정권이 넘어갔다. 인구 규모와 경제 역량으로 보자면 한국의 300만은 독일의 500만보다 큰 심각한 숫자다. 이 정부의 상비약인 규제완화·물가억제·세금인하로 기업 사정이 나아지고 실업자가 약간 줄어들기는 하겠다. 그런데 투자와 고용효과가 얼마나 될까. 단기 처방은 잠재성장률의 자연 하락 추세에 상쇄될 것이고, 종합청사진 없는 개별 조치들은 시장의 반란에 묻힐 것이다.

국민들은 이 정부가 잠재성장률과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멋진 경제정책을 내놓아 지난 정권에서 누적된 불안을 씻어주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유가가 100달러를 넘었다고 새로울 것도 없는 승용차 요일제나 에너지 절약을 외친다면 실망이다. 정신무장하라고 공습경보 사이렌을 계속 울려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좋은 사례가 있다. 1960년대 프랑스의 드골은 자원빈국의 악순환을 끊고자 결단을 내렸다. 내로라하는 경제통들을 모아 진단한 결과, 프랑스를 살리는 길은 에너지와 수송 분야에서 종주국이 되는 것.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TGV, 항공기, TOTAL, 원자력 기술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런 미래지향적 국가정책을 바탕으로 프랑스는 85년 이후 불과 5년 만에 국민소득 2만 달러 고지를 돌파했고, 지금껏 별 탈 없이 첨단기술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70년대의 중화학공업화가 30년 동안 한국을 먹여살렸다. 이 정부가 의욕적으로 내세운 선진화가 ‘제2의 산업화’라면, 그 골격은 무엇인가? 정보·나노·바이오·문화·항공우주·의과학 등 첨단 분야를 뭉뚱그린 것인가, 아니면 금융허브, 또는 에너지 강국? 대장이 최고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짜내야 할 게 이것이다. 서울은 세계에서 인구 1000명당 경제학박사가 가장 많은 도시인데 10년 전 속수무책으로 외환위기를 맞았다. 개인 지능지수는 높은데, 집단 IQ가 낮은 까닭이다. 자원외교도 현장주의도 다 좋지만, 대장이 할 일은 미래 예측, 전략 수립, 선택과 집중이다. 정부도 2008년을 신발전 체제로 명명하지 않았는가? 척후는 주사에게 맡기고, 신발전 체제의 청사진을 보여 달라. ‘선진화 원년’에 또다시 국민들의 입에서 ‘실기’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면 선진 일류국가의 꿈은 사라진다.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