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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쇼핑 나라의 이상한 언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호 19면

일러스트 강일구

어딜 가나 ‘그들만의 언어’가 있다. 기자 시절엔 정의감에 불타올라 ‘조지는’ 기사를 열심히 썼고, 끝나면 술 한잔 ‘빨면서’ 시름을 달랬다. 아이가 반장이 됐을 때는 ‘넣어주어야’ 하는 목록에 학을 뗐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3월엔 반장 턱으로 애들에게 햄버거 하나씩, 5월엔 어린이날 기념으로 간식을 ‘넣어주고’, 학급 도서대와 커튼을 ‘넣었고’ 소풍 땐 선생님 도시락을 ‘넣어드렸다’. 학원에 가니 이번엔 ‘들어가는’ 게 참 많다. 1교시에는 10가(예전의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과정) 선행이, 2교시엔 9나(예전의 중학교 3학년 2학기 과정) 심화가 ‘들어가고’ 3교시엔 언어영역 특강이 ‘들어간단다’. 중학생 애들한테 왜 ‘수학의 정석’이 ‘들어가야’ 되느냐고, 안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하니 그럼 학원을 나가시란다.

그렇지만 이 모든 전문용어의 세계는 TV홈쇼핑의 세계 앞에선 명함도 못 내민다. 홈쇼핑을 들여다보면 상상력과 감수성을 자극받기로는 이곳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 그들은 우리에게 모든 것은 ‘느낌’으로 치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원단감 자체가 달라요” “적당한 길이감이구요” ‘원단’이나 ‘길이’가 아니라 ‘원단감’이나 ‘길이감’이다. 느낄 수 있는 건 더 많다.

메이크업 베이스를 발랐을 때의 ‘발림감’에 남다른 ‘직조감’ ‘직물감’까지. 오감을 열면 모든 건 상상 속에서 느낄 수 있다. “‘레오파드 패턴’에 ‘글리터링 룩’으로 처리하고 ‘스네이크 코팅’으로 화려한 스타일로 마무리한” 독특한 가죽핸드백의 ‘광택감’, “‘핸드 크래프트’의 혁신적 워싱을 거친 ‘아트 피트’ 데님”의 톡톡한 ‘소재감’까지 그 몽환적이고 실체 없는 ‘느낌’의 세계에서 한껏 뻗어나간 내 감성의 촉수는 “처음 드리는” 가격‘적’ 혜택에 남아 있는 시간‘대’가 줄어들고 매진 인장이 찍히기 시작하면 수화기를 들고 싶다는 ‘초조감’으로 바뀐다.

결정적인 멘트는 느낌들만은 아니다. 이 수많은 느낌은 내가 ‘만나 보실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내가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만나 보실 수 있는’ 것이다. 만남은 설렘을 동반하고, ‘만나 보시는’ 건 그 설렘에 따르는 부담마저 떨쳐버리게 한다. 그래 한번 ‘만나 보자’ 까짓 거.

무이자 12개월, 한 달 9900원에 명품의 품격을 누려 볼 수 있다면야.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새로운 감수성들이 나를 만나러 와 이 칙칙한 일상이 갑자기 환해질 그날만이 그려진다. 드디어 수화기를 잡는다. 운 좋게도 “주문이 몰려 상담원과의 통화가 어렵다”는 불행은 내게는 한번도 오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나긋나긋한 쇼호스트들에게 완전 무장해제된 채 나는 카드번호를 불러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물론 생과일 주서기를 만나도 과일을 사오지 않으면 주스의 신선‘감’을 느낄 수 없고, 자동 식기세척기를 만나도 쌓인 설거지 거리를 그 안에 넣지 않으면 남다른 그 청결‘감’은 느끼기 힘든 게 현실이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누가 이렇게 나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계발해주며, 외롭고 허전한 일상에 친절한 ‘만남’을 주선해줄 것인가? 이상한 용어의 나라 ‘홈쇼핑’은 그래서 멀리할 수 없다.


이윤정씨는 문화부 기자 출신의 문화통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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