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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가를 탐험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②

중앙일보

입력

신세계에 드리운 제국 혹은 콜럼버스의 그림자

[1차 항해 1492.8.3-10.12]
콜럼버스의 1차 항해는 1492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약 2개월 보름간 진행된다. 콜럼버스 입장에서는 수년간의 질긴 고투 끝에 얻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가 가장 먼저 찾았던 국왕은 포르투갈의 후안 2세였다. 그러나 스페인에 비해 호전적 기질이 덜하고 막강한 동양세력을 상대하는 포르투갈은 정복 사업에 딱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여러 차례의 거절 끝에 콜럼버스는 에스파냐(스페인)로 시선을 돌려 결국 당시 통치자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여왕1세에게 후원을 받기에 이른다. 죽는 날까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국왕 부부와 콜럼버스는 궁합이 아주 잘 맞았다. 그리하여 지원받은 3척의 큰 배를 거느리고 대서양을 건넌 콜럼버스. 그가 처음 발 도장을 찍은 곳은 현재의 바하마 제도, 산살바도르(San Salvador)였다. 산살바도르는 ‘구세주의 섬’이라는 뜻으로 콜럼버스가 직접 지은 이름이다.

그는 스폰서들에게 상납할 항해일지와 현지일기에 무척 성실했다. 그의 일기에 따르면, 원주민들은 탐험 대원들을 극진히 대접했으며 하늘이 특별히 보내준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콜럼버스는 주로 지형과 농지를 살피며 원주민들이 노예로 쓸모가 있을 것인지 판단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해안가의 지리는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리라도 직접 걷거나 선원들을 시켜서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식민지 정책이 이미 시작된 것이다. 콜럼버스는 스폰서들의 구미를 확실히 당기기 위해 열과 성의를 다해 기록문을 작성했는데 가는 곳마다 그 경관이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자원이 분수처럼 넘쳐나며 원주민들은 아주 다양한 노예로 응용할 수 있음에 한 치의 의심도 가지 않는다며 확신에 확신을 거듭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극악을 떨었던 이유는 바로 군주와의 계약체계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에 정부를 세워 식민정책을 펼치게 되면 그 수익금의 10%를 콜럼버스가 취하도록 계약한 것이다. 그러한 계약조건만 아니었더라도 그렇게까지 무자비하게 식민정책을 강행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콜럼버스가 남긴 기록문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인디오들은 영리하고도 순해서 노예로 아주 적절합니다. 이들의 땅은 폐하의 땅, 이들의 육신 또한 폐하의 것입니다. 저는 폐하께 더 많은 것을 바치기 위해 몸소 섬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인디오들은 모두 벌거벗고 있으며 무기조차도 없어서 저항할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 우리의 노예로 완벽하게 교육시킬 수 있답니다.”

급기야 콜럼버스는 스폰서의 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원주민 몇 명을 납치했다.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사람까지 훔쳐 나온 마당이었는데도 스페인의 페르난도 왕은 그의 귀향 소식이 너무 반가운 나머지 무려 600 킬로미터 이상이나 되는 거리를 이동해 나와 콜럼버스를 반겼다고 한다. 의기양양한 콜럼버스가 진정한 침략자로 거듭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차 항해 1493~]
2차 항해를 떠나는 길. 콜럼버스는 전보다 더 무거운 감투를 쓰고 있었고, 인도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조바심과 죄책감에 소화불량을 앓고 있었다. 배가 뭍에 닿을 때마다, 제발 이곳이 인도이기를 간절히 바랐던 콜럼버스. 하지만 그 속을 알 리 없는 원주민들은 손짓 발짓을 해가며 자신들의 땅은 작은 섬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매번 해안을 걷거나 직접 항해를 해가면서 원주민의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고는 실망이 컸던 콜럼버스. 10% 지분이 어른거리는 터라 조급증은 극에 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발칙하게도 사기극을 꾸미기에 이른다. 선원들을 길게 세워놓고 자신들이 섬이 아닌 육지에 도달했음을 거짓 주지시킨 것이다. 만약 주지한 내용과 다른 사실을 발설한다면 엄청난 벌금형을 내리거나 혀를 자르겠다고 공갈협박까지 했는데 이 내용들은 우습게도 본인이 직접 쓴 항해 일지에 버젓이 나와 있는 것들이다.

첫 번째 항해에서 대충 간보기를 한 콜럼버스는, 두 번째부터는 본격적인 식민지 정책을 자행했다. ‘신세계’ 부왕으로서의 자격이었다. 그는 17척의 배와 1200여 명의 선원들을 이끌고 ‘도미니카, 푸에르토리코, 히스파니올라 섬, 쿠바, 자메이카, 산토도밍고’ 등의 중미를 정복라인으로 구축했다. 순진하게도 그들을 맞이하러 나온 수백 수 천 명의 원주민들을 노예로 다스렸으며 정복이 힘든 부족은 몰살시켰다. 살인과 강간을 수시로 자행했으니 어린 소녀들을 골라 섹스노예로 팔아먹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수치스러운 상황에 절망을 느낀 원주민들은 콜럼버스 일행이 하늘이 아닌 지옥에서 온 악마들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아 집단 자살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노예사업을 확장 시켰으며 경작사업과 착취정책에 공들였다.

[3차 항해 1498-1500]
6척의 배를 가지고 콜럼버스는 3차 항해를 계속했다. 그는 베네수엘라와 오리코노 강 하구를 비롯한 남아메리카를 맴돌며 자신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는 영리한 원주민들과 모종의 거래를 터야 했다. 그렇다 보니 행정이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고 다른 탐험가들과 분업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콜럼버스는 큰 사업을 지휘할 수 있는 그릇이 못 되었다. 너무 커져버린 식민 사업은 열성과 진취력만으로 접근하기엔 무리였다. 더욱이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선원들은 더욱 거칠어져 통제가 되지 않았다. 결국 콜럼버스는 리더의 자질을 의심받아 스페인으로 송환되는 수치를 당하고 만다.

[4차 항해 1502-1504]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순수한 마음으로 탐험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콜럼버스는 그간의 굴욕에 주저앉지 않고 또 다시 뱃길에 오른다. 대서양을 건너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온두라스와 파나마 지협을 발견하고 자메이카를 거쳐 돌아오는 길, 그는 피곤과 열병에 지쳐있었다. 그간의 힘들고도 난잡했던 생활을 돌이켜보자면 당연한 결과였다. 1506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자신이 발견한 신세계가 인도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거리 계산 착오로 인해 그가 발견한 땅은 ‘신세계’도 ‘인도’도 아닌 이미 주인이 있는 땅, 또 다른 대륙이었을 뿐이다. 그의 활약으로 인해 ‘16세기 아메리카와 유럽의 뱃길이’ 크게 발달했다는 것만은 세계사적 업적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참고자료
Columbus and the Age of Discovery by Zvi Dor-Ner with W. Scheller, Morrow and Company, Inc., New York
Columbus in the Americas by William Least Heat Moon, John Willey & Sons, Inc.,
Christopher Columbus by John Boyd Thacher, AMS Press, Inc., Kraus Perprint Co. New York
The voyage of Christopher Columbus’s Own Journal of Discovery Newly Restored and Translated, St. Martin Press New York

자료 및 그림 / 이 시 원
글 / 프리랜서 장 정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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