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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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제2부 불타는 땅 새들은 돌아오지 않았다(23)바다가 핏빛으로 물들면서 저녁이 왔다.새들도 무슨 낌새를 알아차렸는가.날고있는 갈매기들조차 별로 눈에 띄지 않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징용공들은 길고 길었던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고 있었다.세수를 하고돌 아오던 박서방은,그나저나 어디 다치지나 않은 게 다행이다 생각하면서 마당가에 길게 침을 뱉었다.대창을 무릎에 놓고 발을뻗고 앉아 있는 최씨가 보였다.박서방이 옆에 가 주저앉으며 때묻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꽃놀이 하는 줄 아나,얼굴을 다 닦게.』 『그 좋던 신색 다 개 물려 보내고 내 꼴이 이게 뭔가 싶다.까마귀신세가 돼서탄 캐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돌팔매질이나 하고 있으니… × 작아서 장가 못 갈까마는,내 꼴을 내가 봐도,앞일이 뒤숭숭하다.』 중얼거리고 나서 박서방이 최씨에게 다가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그가 고개를 숙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어느 칼에 맞아 죽을지 모르는 판이니… 차라리 나도 튀는 건데 그랬나 봐.』 『십년 과부가 고자 영감 만난대.지나간 일가지고 뭘 구시렁거리나,이제와서.잰 놈이 뜬 놈만 못하대잖어.
그나저나 그 사람들은 갔겠지? 잘된 일이다.』 『아직 잡혀왔다는 소리가 없잖어.살았다는 얘기지.』 최씨가 입맛을 다셨다.
『이게 바로 진상 송아지 배때기 찬 꼴이 아니고 뭐냔 말여.
우리가 이래 봤자 무슨 이득이 있는 거여.그야 말로 제가 제 눈 찌르기지,안 그래? 이거야말로,제가 눈 똥에 제가 주저앉는꼴이라구.』 『다 함께 고생하는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하는소린가 모르겠네.』 『누구 좋자고 이짓을 하고 있냐 말이지.』『시끄럽다,치워라.』 『안 그래? 내말이 틀렸냐구.이거야 ×도못하고 불알에 똥칠만 하는 꼴이지.도망치는 놈들 위해 설장구 치다가 우리만 대가리 터지는 꼴이 났으니 말이여.』 『난 그렇게는 생각 안 한다.조선사람 한 사람이 지면 그게 열 사람 백사람이 지는 거다.나는 끝까지 해 볼란다.죽지 않으면 살겠지.
』 『여우 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더라.너도 미련하기로는 조선에 둘째가라면 서러울라.』 『냉수 먹고 갈비 트림하고 자빠졌다.생각만 같아서는 그냥 저놈들 아파트에 화약을 터뜨려버렸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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