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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어린이책] 신여성 나혜석 결혼조건은 “그림 그리는 것 방해 말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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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저것이 무엇인고
한상남 지음,
샘터사,
160쪽, 1만1000원

‘저것이 무엇인고. 아따 그 기집애 건방지다. 저것을 누가 데려가나.’

‘고것 참 예쁘다. 장가나 안 들었더라면…맵시가 동동 뜨는구나.’

바이올린을 들고 걸어가는 신여성에게 무조건 건방지다고 손가락질 해대는 두 노인, 그리고 맵시가 좋다며 흑심을 품는 젊은 유부남. 1900년대 초,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이런 내용의 만평으로 고발했다. 이를 그린 이는 이 땅의 첫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 ‘첫 개인전’ ‘첫 세계일주’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 신여성이었다. 그만큼 그의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혹독한 삶을 살았다. 섣달 대목엔 집안일로 이른 시간부터 물에 말은 밥조차 제대로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허둥댔는가 하면, 온종일 바느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런 삶을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 조선 여성 가운데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걸었다. 일본에 유학해 유화를 배워 화가가 된 것도 그 하나다. 시와 소설을 쓰고 신문 만평을 그린 것도, 3·1만세 운동에 참가해 감옥에 갔다 오는 등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면서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는 조선 신여성의 표본이 됐다. “여자도 사람이다. 여자라는 것보다 먼저 사람이다. 또 조선 사회의 여자보다 먼저 우주 안, 전 인류의 여성이다”라는 주장을 글로만 쓴 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한 것이다. 나혜석을 한국 페미니즘의 발원지로 보는 이유다.

결혼에서도 당찬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스물다섯에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을 결심하면서 ‘변치 않는 사랑을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는 함께 살지 않을 것’이란 조건을 내걸었다. 남녀차별이 도도했던 그 시대에 이런 조건은 파격 그 자체였다. 신혼여행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 첫사랑 최승구의 무덤을 신혼 여행지로 택하기도 했다.

이 당돌한 신여성도 자유로운 연애까지는 관철하지 못했다. 남편과 3년간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파리에서 만나 감정을 통했던 최린과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해 결혼생활이 파경에 이른 것이다. “과연 내 생활 중에서 그림을 제해 놓으면 실로 살풍경이다. 사랑에 목마를 때 정을 느낄 수 있고(…) 괴로울 때 위안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림이다.” 현실이 까칠할수록 그는 더욱 그림에 몰두해 일가를 이뤘다.

하지만 마지막은 너무도 살풍경했다.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던 1945년 8월, 신원미상의 53세 여성의 죽음이 관보에 실렸다. 누더기를 걸친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나혜석이었다. 시대를 너무도 앞서간 그는 그렇게 전설이 됐다.

이 책은 나혜석의 불꽃 같은 삶을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그렸다. 그가 남긴 글과 그림을 풍부하게 담아 진면목을 직접 느낄 수 있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와 황애시덕, 한국의 첫 여기자 최은희, 한국여성으로 파리에 유학한 화가 백남순 등 그가 교류했던 신여성들의 이야기는 덤이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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