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모든 장애인이 수퍼맨이면 좋겠지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목 아래 전신이 마비된 이상묵(46)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의 사연이 그제 본지 1면·10면에 크게 실렸다. 기사 제목은 ‘강단에 선 그는 수퍼맨이었다’. ‘서울대의 스티븐 호킹’이라는 표현도 뒤따랐다. 이 교수는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후 재산을 털어 척추질환자를 위한 재단을 세운 영화 ‘수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를 자신의 영웅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나를 살린 건 줄기세포 아닌 IT(정보기술) 장비”라는 이 교수의 한마디는 나를 포함한 모든 알량한 ‘정상’인의 무심과 무식, 허위의식을 까발리고 파헤친 죽비 소리였다. 장애인의 사회복귀를 돕는 첨단 장비나 기술이 없어서도 아니고 거액이 드는 것도 아니고 단지 ‘홍보’가 부족해서라니. 무척 신기해 보이는 장비와 소프트웨어가 휠체어를 빼면 300만원도 안 된다니. 대한민국은 이제껏 몰라서 안 했던가, 알고도 안 했던가.

이 교수 같은 ‘수퍼맨’은 그래서 필요하다. 그가 입원했던 LA 재활병원에는 한국의 국회의원들도 다녀갔다고 한다. 다들 “놀랍다”를 연발하고 돌아갔지만 꿩 구워 먹은 소식이라 했다. 이 교수는 장애인이 된 후 당연히 뒤따랐을 마음고생까지 극복하고 재활을 거쳐 마침내 서울대 강단에 다시 섰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그의 여유가 장애인들에게 미칠 긍정적 영향은 이루 측정하기 힘들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를 포함한 ‘정상’인들의 소견은 너무 좀스럽고 야박하다. 우리는 많이 배우고 미국 유학하고 국내 최고라는 대학의 교수이던 이 교수 같은 이가 장애인이 되고 역경을 극복해야 비로소 관심을 갖는다. 한국에서도 스티븐 호킹, 크리스토퍼 리브가 나왔다고들 말한다. 우리는 차인표·신애라 부부가 새 아기를 집에 들일 때 입양문화에 반짝 관심을 갖는다. 탤런트 김혜자씨, 작가 공지영씨가 아프리카에서 눈물을 쏟아야 제3세계 난민·빈민의 비참한 삶에 잠깐 눈길을 준다.

내가 아는 정신과 의사의 아이는 정신지체 장애인이다. 기독교 신자인 의사 부부는 늘 “다른 집에 태어났으면 더 불행했을 수도 있는 아이를 마침 우리 집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한다. 자폐증을 가진 딸 이사벨을 키운 경험을 책(『낯설지 않은 아이들』)으로 펴낸 미국의 심리·의료 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는 “이 세상에는 이사벨과 같은 아이가 하늘의 별만큼 많다. 모든 국가, 모든 대륙에 이사벨과 같은 아이들이 있다”고 외쳤다. 그렇다. 얼핏 머리에 떠올려 보아도 장애인 가정은 주변에서 낯설지 않다. 발달장애 아들(15)을 둔 가수 이상우씨는 지난해 KBS-2TV ‘인간극장’ 출연 제의를 받고 6개월을 망설였다. 방영 후 한 발달장애아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와 “그동안 숨겨 왔는데 이제는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얘기한다”고 말했을 때 참 기뻤다고 한다. 김진선 강원도지사는 장남(28)이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이다. 김 지사는 입버릇처럼 “강원도를 장애인 복지 시범 도로 만들자”고 다짐한다. 그의 부인은 장애인 시설 봉사활동에 지극 정성이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다운증후군을 앓는 딸(16)이 “어떤 가치와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라고 말한다.

이상묵 교수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건이 너무 열악해 이 교수나 다른 ‘정상’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애인이 훨씬 많다는 점을 기억하자. 한국의 장애인은 99%가 수퍼맨이 아니다. 대개는 장애뿐 아니라 가난·가정불화·학업부진 같은 다른 어려움을 동시에 겪고 있다. 이중·삼중의 약자, 말하자면 ‘다중(多重) 마이너리티(minority)’인 경우가 아주 흔하다. 고전적인 광고 용어를 빌리자면 이 교수 같은 수퍼맨은 그들에게 ‘샤워 효과’를 선사하는 존재다. 샤워기 물이 아래로 흐르듯 용기와 노하우와 법적·제도적 뒷받침이 수퍼맨 아닌 장애인에게도 골고루 스며들어야 한다. 여기엔 보수·진보가 따로 없다고 나는 믿는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