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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스티코프비망록>3.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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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박헌영파(朴憲永派)가 남로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수습 기미를 보였던 좌익 3당합당은 10월16일 박헌영중심의 합당에 반대하는 강진.백남운등이 독자적으로 반대파를 규합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하면서 또 한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뜻밖의 사태전개에 당황한 蘇군정과 북로당은 남쪽 상황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스티코프비망록』은 이러한 개입의 사례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우선 로마넨코와 김일성.김두봉이 반대파의 대부격인 강진. 백남운을 각각 만나『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추궁했다.지금까지 반대파들이 북으로부터 비판당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蘇군정과 북로당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백남운과 강진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로당이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사로당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11월1일 사로당은 위원장 여운형,부위원장 백남운.강진이 포함된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여운형.강진.백남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개별인물에 대한 비판외에도 사로당을 공식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11월16일 북로당은 남로당 정치노선 절대지지와 강진등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사로당에 관한 북로당의 결정서」를 발표했다.이것은 蘇군정의 지지를 기대했던 사로당에는「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蘇군정의 입장이 강력하게 표명되자 사로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랐다.결국 남로당은 11월23~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출범했고,사로당은 47년 2월 당대회를 열고『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蘇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스티코프는 12월2일『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을 지시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蘇군정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10월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다.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남로당과 북로당 창당작업이 완료되자 두당간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현안으로 등장했다.스티코프가『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 한다』고 지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스티코프는 12월6일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와관련,46년 12월12일자『비망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담고 있다.즉 박헌영이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김일성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이것은 48년 8월25 일 만들어진「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구성을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기 위해강요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박헌영은 월북후 자신의 당내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것으로 보인다.46년 12월3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3당합당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이로써 4개월간에 걸쳐 파란을 겪었던 3당합당이 사실상 마무리됐다.그러나 남한 좌익정당의 단결과강화를 위해 추진된 3당합당은 좌익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앙금만을 남겼다.
단일한 좌익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美군정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려던 蘇군정의 의도도 합당전에 10월폭동이 발발함으로써 사실상 좌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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