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드베데프, 과거 푸틴처럼 서서히 독자 노선 걸을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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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크렘린궁에서 멀지 않은 모스크바 최고 중심가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있는 서점 ‘모스크바’. 4일 오후 각종 기념품을 함께 파는 이 서점의 높은 선반 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右) 대통령의 엄숙한 얼굴 표정을 담은 액자 몇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가로 40㎝, 세로 50㎝ 크기의 액자는 4800루블(약 20만원). 직장인 한 달 평균 월급이 50만원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만만찮은 가격이다. 점원은 그러나 “푸틴의 초상화를 찾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고 귀띔했다. 임기 말에도 80%대의 지지를 누리고 있는 푸틴의 인기를 반영한 현상이다. 푸틴에 대한 러시아 국민의 지지는 숭배에 가깝다.

“푸틴 대통령은 그루지야나 우크라이나처럼 미국에 완전히 종속된 이웃 국가들의 정책과 달리 자주적 민주주의를 도입했다…. 그는 국가 위에 군림하려는 석유 올리가르히(재벌)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영광스러운 길로 이끌었다.”

올해 초 러시아 교육과학부에 의해 고교 3학년 역사 교과서로 처음 인정된 ‘러시아사 1945~2007’에 포함된 내용이다. 올 9월 새 학기부터 러시아 전역에서 사용될 이 교과서는 푸틴을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치켜세우고 있다.

푸틴은 5월 초 자신이 후계자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시킨 드미트리 메드베데프(左) 제1부총리에게 크렘린(대통령궁)의 집무실을 넘겨준다. 3연임을 금지한 헌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권좌에서 물러나는 그는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이 되면 총리를 맡겠다고 공언해 왔다. 메드베데프도 대선 뒤 첫 기자회견에서 “총리를 맡을 푸틴과 효율적인 협력을 계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푸틴 시대에는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총리는 보조 역할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푸틴 총리가 어떤 식으로 권력을 나눠 가질지에 쏠려 있다.

당장은 메드베데프가 외교와 국방, 푸틴이 경제와 사회문제를 책임지는 형태가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푸틴이 권력을 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제로 푸틴은 지난달 중순 기자회견에서 “가장 큰 행정권력은 총리가 이끄는 정부에 있다”며 “총리가 되더라도 집무실에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초상화는 걸지 않겠다”는 말까지 했다. 대통령은 ‘얼굴 마담’이고, 정치적 실권은 자신이 행사하겠다는 뜻을 암시한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푸틴이 총리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헌법을 개정하는 방안, 메드베데프가 미숙한 국정 수행이나 건강을 이유로 조기 사퇴하고 푸틴이 크렘린으로 복귀하는 시나리오까지 거론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메드베데프가 푸틴의 그늘에서 벗어나 서서히 권력을 장악해 갈 것이란 관측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0년 보리스 옐친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넘겨받은 푸틴이 얼마 지나지 않아 옐친 세력을 척결하고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을 선례로 든다.

블라디미르 밀로프 에너지정책연구소 연구원은 “스스로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상황에서 예전 상관에게 일일이 허가를 얻는 사람이 있겠느냐”며 “메드베데프가 점차 상황을 변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정치학자 안드레이 오카라도 “러시아 정치문화에서 이중 권력은 오래가기 힘들다”며 “푸틴이 조만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푸틴과 메드베데프가 주도권 싸움을 벌이면서 러시아 정치가 혼란에 빠지는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모스크바=유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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