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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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맨 처음,여자의 육신을 대지에다 비긴 것은 누구일까.
절묘한 비유가 아닌가.
「보배」를 뜻하는 일본말 「다카라」는 원래 「따 갈아」라는 우리 옛말에서 빚어졌다 한다.「땅 갈이」의 뜻이다.
땅을 갈아 얻어지는 오곡이 바로 고대의 「보배」였기 때문일 것이다.곡식은 일찍이 보배였다.
땅은 갈지 않아도 땅이다.
그러나 갈면 비옥한 논밭이 된다.「다카라」,즉「보배」의 땅이되는 것이다.
여자의 육신을 대지에 비긴 이는 이 이치를 터득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길례의 대지를 갈아 「보배」로 일군 것은 아리영 아버지다.
길례는 꿇어앉아 잡초를 뽑았다.
줄기도 뻣뻣했지만 뿌리는 더욱 질겨서 제대로 뽑히지 않는다.
손끝이 검푸르게 물들었다.
민들레의 긴 꽃자루는 여느 잡초와 달리 뜻밖에 연약했다.아주싱그럽고 연한 양상추 줄기처럼 「사각」소리를 내며 길례의 손 끝에서 쉽게 꺾였다.
하지만 뿌리는 꼼짝 않는다.민들레는 꽃자루 길이의 일곱갑절이나 깊이 뿌리내린다지 않는가.
꽃 꺾은 것을 뉘우치며 집에 가지고와 유리컵에 꽂아뒀다.민들레를 볼 때마다 그 긴 뿌리의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다음 날은 역사대학 졸업식이었다.
졸업장을 받아든 주부들은 작은 성취감으로 활기차 있었다.
집안에 갇혀 있는 주부들에게 있어 공부는 자유를 호흡하는 것과 같았다.졸업은 특히 하나의 자랑스런 성취였다.
졸업식에 이어 베풀어진 다과회는 그래서 더욱 즐겁게 흥성댔다. 오렌지주스를 손에 든 길례에게 반가이 다가오는 여성이 있었다. 아리영이었다.
웬일일까.
『오랜만입니다.친구분들 뵙고 싶어 올라왔어요.오늘 아니면 또뵐 수 없을 것 같아서….그새 안녕하셨어요?』 경쾌하고 달콤한목소리였다.여전히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야들야들한 물빛 무늬 조제트의 레어드 룩이 선녀의 날개옷 처럼 하늘거렸다.
『잘 오셨어요.』 손 잡는 길례의 귀에다 대고 아리영은 재빨리 속삭였다.
『흰자작나무 숲에서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셔요.』 가슴이 철렁했다. 『….』 『만나 봐 주셔요.』 아리영은 간청하듯이 하고서여사 쪽으로 날렵하게 가버렸다.
난감했다.아리영은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한동안 망연히 서 있다가 흰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민들레 솜털이 어지럽게 날고 있었다.
감색 재킷과 은회색 바지의 콤비를 산뜻하게 입은 신사 모습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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