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기쁨 <51> 최고의 빈티지를 마시는 기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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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호 35면

와인 만들기의 기본은 흔히 천·지·인이라고 한다. 아무리 뛰어난 생산자(人)와 아무리 훌륭한 밭(地)이 있어도 그해 기후(天)만큼 와인의 질을 좌우하는 요인은 없다. 나는 빈티지가 다른, 즉 각각 서로 다른 해에 생산된 바롤로(Barolo)를 최저 열 병, 많을 때는 서른 병 넘게 비교해 시음하곤 한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판매됐으며 유독 개성이 넘치는 2000년, 2001년, 그리고 2002년산 바롤로를 비교해볼까 한다.

伊 피에몬테州 ‘바롤로’

2000년은 몹시 더웠던 해라 바롤로에 들어가는 포도 품종은 아주 잘 익었다. 직사광선으로부터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포도 껍질은 짙은 색 옷을 입었고, 포도 자체의 당도가 매우 높아 풀 보디에 진하고 감칠맛 나는 와인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언론은 하나같이 ‘바롤로 최고의 빈티지’라며 칭찬했다. 여성에 비유하면 ‘그라비어 아이돌(그라비어 인쇄법으로 제작한 수영복 화보의 모델)’ 같은 빈티지다.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는 현기증 날 듯한 페로몬과 글래머러스한 몸매는 거부할 수 없는 희열과 퇴폐적인 쾌락을 담고 있다.

그러나 2000년산은 숙성에 필요한 산이 부족해 마실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 그라비어 아이돌로 끝날 것인지 대여배우로 성장할 것인지는 와인 생산자의 손에 달려 있다.

2001년은 드물게 보는 걸출한 빈티지다. 계절의 변화가 완만하고 심각할 정도로 강수량도 적었던 해다. 덕분에 포도가 천천히 익었다. 또 긴 시간을 두고 서서히 수확하면서 좋은 과일을 고를 수 있어서 본래 바롤로가 추구하는 대로 클래식하며, 정성이 담긴 위대한 와인이 나왔다. 내성적이지만 고상한 품격과 지식, 정확한 판단력과 표현력, 수다스럽지 않으며 언젠가 높이 비상할 때를 차분히 기다리는 느낌은 젊고 유능한 피아니스트를 닮았다. 뛰어난 생산자가 만든 2001년산 바롤로는 셀러 깊숙한 곳에 묻어놓고 그 존재를 잠시 잊어두길 바란다.

이탈리아 레드와인의 명산지 피에몬테에서 생산된 명품와인 바롤로. 빈티지에 따라 전혀 다른 매력이 돋보인다.

우박 피해라고 하면 독자 여러분은 어떤 것을 상상할까? 일본에서는 기껏해야 작은 얼음 알갱이가 싸라기눈처럼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정도지만 피에몬테 주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야구공만 한 얼음 덩어리가 떨어져 와이너리의 지붕을 뚫는 일도 종종 있다. 2002년 피에몬테의 우박 피해는 유명 양조가 루치아노 산드로네의 포도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만큼 심각했다. 많은 생산자가 자사의 자랑스러운 포도밭 이름을 딴 톱 와인 생산을 포기하고 그 포도를 평범한 바롤로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2002년은 그야말로 와인 생산자의 수난과 노력의 해였다. 예전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소년이 피나는 노력을 통해 위대한 프로야구 타자가 되어 주인공 투수에게 도전한다는 내용의 야구만화가 있었다. 2002년산 와인은 그 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노력과 인내의 와인이라 할 수 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 어려운 해에 용케 근사한 와인을 빚어냈음을 감탄하게 만드는 ‘숨은 실력자’의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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