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공의 표적’된 1등의 고민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지난해 국내 4대 그룹 중 가장 ‘행복’했던 곳은 어디일까? 일단 비자금 사태에 휘말린 삼성과 환율 하락, 기아차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현대차는 후보에서 제외다. LG그룹은 지난해 사업이 전반적으로 턴어라운드(흑자전환)하는 경사를 맞았지만 그 과정이 행복했다고 보긴 힘들다. 주요 계열사의 CEO가 교체되는 등 변화의 시간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반면 2004년 ‘소버린 사태’로 그룹이 존폐의 위기까지 몰렸던 SK는 지난해 정유와 통신 두 축이 안정적으로 성장했다. 여기에 정유는 국제 유가 급등과 함께 수출도 늘어나는 등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그룹의 지배구조 역시 지주회사 체제 출범과 함께 안정적인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고 있다. 사외이사를 주축으로 한 이사회 중심의 경영을 통해 다른 그룹보다 선진적인 경영 방식으로 주목 받고 있다.

최태원 회장의 활동 또한 주목의 대상이었다. 페루의 유전현장을 직접 둘러보는가 하면, 남북 정상회담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직접 사진을 찍어 화제가 됐다. 이 과정에서 대중적인 손목시계가 노출되면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 프로야구팀 SK와이번스 경기를 일반석에서 응원하는 등 젊은 재벌 총수의 장점을 한껏 드러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SK는 ‘행복’이라는 TV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어쨌든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4대 그룹 총수 중 가장 행복한 한 해를 보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 듯하다. SK도 마찬가지다. 2008년 들어 SK는 갖가지 악재와 만나고 있다. 우선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통신요금과 기름값을 인하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서민생활물가 인하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주요 타깃은 통신료와 휘발유 가격이다.

SK그룹의 양대 사업 축인 정유와 이동통신은 각각 국내시장 점유율 1위다. 새 정부는 다행히 직접적인 가격 인하 요구를 거뒀지만 가격 인하 압력은 여전히 남아있다. SK의 한 관계자는 “이동통신과 휘발유 모두 1등이라 공공의 표적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하나로텔레콤 인수과정에서 800㎒ 주파수 대역을 KTF와 LGT에 개방하거나 로밍을 허용하라는 의견도 나왔다. 다행히 정통부가 “800㎒ 주파수 개방은 인수조건이 아니다”고 해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공정위는 여전히 주파수 개방을 주장하고 있어 압력이 남아있다.

SK그룹이 난감해 하는 것은 최근 불거지는 문제들이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이다. 일단 문제의 차원이 다르다. 지난 4~5년간 곤욕을 치렀던 회사 지배권과 분식회계 같은 것들이 회사 내부 문제라면 요즘 쟁점들은 회사 외부에서 시작된 문제다.

사실 SK그룹은 ‘외부’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체질이다. 국가 기간산업이자 생활과 밀접한 산업인 통신과 정유의 사업구조가 지나치게 내수 위주로 돼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나가도 정부나 여론의 압력이 거세지면 짧은 시간에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

해외시장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통신은 이렇다 할 성과가 없는 상태다. 정유 역시 지난해 수출이 내수보다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내수기반인 데다, 생산기지 역시 대부분 국내에 있다. 거대 그룹이지만 사업이 지나치게 몇몇 요소에 의존해 있다는 얘기다.

최태원 회장이 최근 ‘CDMA 위기론’을 주장한 것이나 고위 임원에게 “글로벌 사업을 제대로 해보고 싶다”고 자주 이야기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최 회장은 2년 전부터 ‘글로벌리티(Globality)’라는 단어를 자주 써가며 직원들에게 글로벌한 마인드, 글로벌한 감각을 요구해오고 있다.

사실 요금 인하 자체는 SK텔레콤 입장에서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SK텔레콤의 한 임원은 “그동안 후발주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부에서 요금 인하를 사실상 막아왔다. 요금을 대폭 내리면 후발주자들은 수익성 악화로 생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2월 4일 SKT가 발표한 이동전화 요금 인하안을 놓고 KTF, LGT 등 후발사업자들은 좀처럼 대응을 못하고 있다. 시장점유율 50%가 넘는 SKT보다 파격적인 요금 인하안을 새롭게 내놓기가 쉽지 않은 데다 출혈식 맞대응 전략은 더 이상 득이 될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KTF 관계자도 “후발사업자가 요금 인하를 시행하더라도 자금력 등 절대적으로 불리한 경쟁여건으로 인해 선발사업자에 맞서기가 쉽지 않다”면서 “서둘러 내놓기보다는 시간을 갖고 충분히 검토해 경쟁력 있는 요금 상품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사실 최 회장이 수년 전부터 글로벌을 강조한 이유는 따로 있다. 단순히 시장 확대를 얘기한 것이 아니라 국내시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SK의 사업방식을 바꾸겠다는 뜻이다. SK텔레콤의 한 고위 임원은 “최 회장은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한 사업을 계속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의 매출이나 수익성을 개선하는 차원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라는 얘기다. 최 회장이 최근 CDMA 위기론을 꺼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한국 1등’은 아무리 견고해도 소용 없다는 뜻이다.

SK텔레콤의 한 임원은 “세계 통신시장은 저개발국 위주로 점점 성장하는데 SK는 정체된 국내시장을 넘어서는 성과를 못 내고 있다. 그게 회장 눈에는 큰 문제로 보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CDMA로는 지속적인 성장에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또 다른 해석도 있다. 3세대 이동통신이 본격화되면 CDMA나 GSM의 구분이 없어지고 자유롭게 한 단말기로 로밍할 수 있게 된다. 국가 간, 기업 간 협정이 체결된다면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 통신회사와 경쟁할 수도 있다.

이렇게 기술이나 통신 표준에 의한 장벽이 없어질 때 과연 SK텔레콤이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최 회장의 질문이다. 국내 부동의 1위라는 것에 자만해 변화하는 환경이나 미래에 대비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은 것이라는 얘기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여유 있던 모습과 달리 상당히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 사업구조를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상층부의 이런 기류는 밑으로 서서히 퍼지고 있다.

김신배 SK텔레콤 사장은 지난 1월 31일 사내방송을 통해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이 많은 해”라며 “국내사업의 경우 끊임없이 제기되는 통신요금 인하, 보조금 규제 폐지, 재판매 의무화 도입 등 만만찮은 시장 상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이날 방송에서 베트남, 중국, 미국 등 글로벌 사업을 일일이 열거하며 새로운 성과를 창출할 것을 주문했다.

이석호 기자 lukoo@joongang.co.kr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