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흔들린다>中.깨어진 安全신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도쿄(東京)신주쿠(新宿)자택에서 지하철로 도라노몬(虎の門)에있는 회사로 출근하는 야마구치 히로시(山口浩.35)는 지하철 입구에만 들어서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또 사린가스가 살포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성수대교(聖水大橋)가 붕괴된 다음 한강의 다른 다리를 건너던 서울시민들이 느꼈던 공포감과 같은 것이다. 지난달 백주(白晝)의 도쿄 한복판 지하철에서 많은 무고한 시민을 죽거나 다치게 한 무차별 가스테러는 일본 국민들에게 천재지변 이상의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후 심각한 부작용이 잇따르고 있다.물소동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범행단체로 지목되던 오움진리敎 아사하라 쇼코(麻原彰晃)교주가『3월15일 도쿄에서 이변(異變)이 일어날 것』이라는 해괴한 예언을 하자「자라보고 놀란 가슴이 된」사람들 이『이번에는수돗물에 독을 탄다더라』며 생수(生水)사재기에 나섰던 웃지못할해프닝이었다.비록 15일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나흘후 요코하마(橫濱)JR(일본철도)驛에 또 다시 괴가스가 퍼져 사람들이 쓰러지자 일본 국민들은『도대체 정부는 뭘 하고 있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택시 운전사 이토 다카시(伊藤隆.40)는『오움진리교는 내란을일으키고 있는 겁니다.나라에서는 이럴 때 자위대를 동원해 쓸어버리지않고 자위대 르완다 파견이다,골란고원 파견이다 엉뚱한 짓만 하고 있으니…』하며 혀를 찬다.
당국의 무능함은 불안한 국민들의 정서를 우경화(右傾化)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재일동포 서유행(徐裕行)씨가 오움교 2인자를살해한 데 대해서도 일본언론과 국민들은 종전과 눈에 띄게 다른반응을 보이고 있다.지금과 같은 심리상태에서 는 일본인 누군가에 의해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겉으로는 국회 부전(不戰)결의 반대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일본 우익단체의 시위가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 볼대목이다.정권이 무능할 때 기승 을 부리는 것이 우익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일본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이번뿐이 아니다.지난 1월17일 전후(戰後)최대의 천재지변인 효고(兵庫)縣남부지진이 발생해 5천명이상의 사람들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때 정부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성토는 대단했다 .
***헛도는 행정력 중앙과 지방간에 잘게 분산된 행정력이 어긋난 톱니마냥 헛도는 바람에 초기 구조작업이 늦어져버렸으며,컴퓨터.전자산업 대국(大國)을 자부하던 나라의 공무원들이 PC통신같은 정보네트워크 하나 제대로 활용못해 사상자나 피해상황 파악이 더 뎠다는 지적이었다(『위기관리의 철칙』하세가와 게이타로著).정부의 계속되는 무능함을 보다못한 일본의 언론은『지금까지일본의「안전 시스템」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고 개탄했다(4월20일자 마이니치신문 사설).이를 뒤집어 말하면『일본은 이제종합적인 시스템 정비작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다급한 목소리다.
패전 이후 일본은 경제발전을 지상(至上)목표로 삼아 달음질쳐왔다.그 결과 1인당 국민소득 2만8천달러로 세계 정상에 우뚝서게 됐다.그러나 통계상의 풍요로움 뒤에는 토끼장같은 집에서 살아가는 일본 국민들의 허탈감이 숨어있다.또 목표 를 이룬 뒤새로운 목표를 찾지 못해 허둥대는 모습이 선명하다.그야말로「마음의 공동화(空洞化)」현상이다.
일본의「안전신화」붕괴는 이제 일본의 전후 50년을 반성하게 하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번영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전후(戰後)일본의「부(負)의 유산」은 정치.경제.사회.문화.교육.가정 등 온갖 분야에 퍼져 있다.
집단적인 힘을 강요했던 기업전사(企業戰士)문화가 어린 학생들에게 잘못 전달돼 돌출된 동료를 제거하고야 마는 악질적인「이지메」를 증폭시키고 있으며,경제성장의 부작용인 물질만능주의는 저질 섹스산업과「헤어 누드」선풍을 만들어냈다.
해마다 찍혀나오는 전체 출판물의 약40%(약22억5천만권)가만화책일 정도로 광적(狂的)인 만화 붐은 일본사람들을 크게 바꿔가고 있다.책읽기를 좋아하고 탐구심이 강했던 과거의 일본사람들은 차츰 줄어들고 순간적이고 흥미위주의 만화책 을 찾는 새로운 유형이 젊은층을 석권하고 있다.
***가족관계 흔들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집 장만의 꿈도 못꾸는 일본의 경제현실이 아내들을 아르바이트 전선으로 내몰고 있으며,아이들은 부모없는 집에서 전자오락에 몰두하고 있다.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전통적 일본 가정교육 대신 경박한 서양식 가치관이 급속히 파고들어 기존의 가족관계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풍요의 나라」 일본의 현주소다.
『일본은 이제 물질의 풍요보다 마음의 풍요를 찾아야 할 때』라는 호소가 뜻있는 일본인들 사이에 공감대를 이루는 것도 이 때문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