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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구화 ‘에어 조던’의 시대는 가도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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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26면

20년 전의 일이다. 나중에 ‘전설’이 되는 젊은 농구 선수가 한 손에 공을 쥐고 뛰어올랐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했지만 그는 아직도 허공을 날고 있다. 그는 농구와 스포츠문화, 심지어 스포츠산업의 벽마저 훌쩍 뛰어넘었다.

마이클 조던(45)의 1988년 미 프로농구(NBA) 슬램덩크 콘테스트 우승 장면. 당시 24세 한창 나이의 조던은 자유투 라인에서 뛰어올라 바스켓을 두들겼다. 그가 림을 향해 허공을 날던 모습은 농구화의 로고(점프맨)로 변용된다. ‘에어 조던’ 농구화 시리즈의 시작이다.

에어 조던 시리즈가 등장한 해는 85년이지만 ‘점프맨’ 로고가 등장하는 88년이야말로 에어 조던의 시발점이다. 흰색이 대부분이던 농구화 시장에 등장한 검정과 빨강의 에어 조던은 충격적이었다.

당시 NBA의 공식 경기화는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가 광고에 등장하는 컨버스였다. NBA는 에어 조던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착용을 금지했다. 조던은 경기당 벌금 5000달러를 감수하며 에어 조던을 신고 경기했다. 물론 벌금은 나이키에서 냈다.
나이키는 조던을 앞세워 대형 업체로 성장했다. 그러자 경쟁사들도 스타 선수들을 영입, ‘스타 마케팅’ 시대의 막을 열었다.

리복은 92년 데뷔한 샤킬 오닐과 계약해 ‘샤크’ 시리즈를 내놓았다. 2003년 드래프트를 통해 NBA에 데뷔한 르브론 제임스와 카멜로 앤서니가 나이키와 계약했고 같은 해 드웨인 웨이드는 내리막길을 걷던 컨버스와 계약했다. 아디다스는 케빈 가넷,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등을 간판으로 내걸고 있다.

그러나 어떤 선수의 이름을 내건 농구화도 에어 조던 시리즈와 같은 시장 장악 능력과 높은 브랜드 가치를 따라가지 못했다. 한때 조던 못잖은 명성을 누린 패트릭 유잉은 ‘더 유잉스’라는 브랜드로 사업에 진출했지만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나이키도 에어 조던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다. 94년 피닉스 선스에서 뛴 찰스 바클리는 이니셜을 딴 CB 시리즈로 라이벌 조던과 함께 ‘나이키 홍보대사’가 되었다. 한
때 조던의 후계자로 꼽히던 코비 브라이언트는 96년 아디다스와 맺은 6년 계약이 만료되자 2003년 6월 나이키호(號)로 갈아탔다.

올해 초 나이키는 에어 조던 XX3(로마 숫자 20과 3의 결합)을 출시했다. 1월 한 달 동안 미국 내 23곳의 매장에서만 230달러(약 21만7000원)에 한정 판매됐으며 지난 주말부터 미국 전역에서 185달러에 팔리고 있다. 등번호 23번을 달고 뛴 조던의 로고가 새겨진 신발이 23번째 모델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소문도 있다.

미국 남가주대의 토드 보이드(대중문화학) 교수는 지난달 ESPN.com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썼다.

“조던이 2003년 은퇴하자 이 농구화의 위력도 전 같지 않았다. 에어 조던이 나오지 않아도 슬퍼할 일은 아니다. (에어 조던은) 대중문화를 변화시켰고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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