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패션의 달콤한 유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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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37면

슬슬 겨울옷을 정리할 때다. 이제 날이 더 풀리면 입지 않을 두꺼운 옷들을 서랍 깊숙이 넣다 보니 이런 게 나한테 있었나 싶은 옷이 한두 개가 아니다. 겨우내 한번도 꺼내 입지 않은 건 물론이고 거기 박혀 있는지조차 몰랐던 옷들이다. 오래된 것도 있지만 두세 해 전에 산 것도 있고 이번 겨울 직전에 산 것도 있었다.

조동섭의 그린 라이프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옷은 대개가 몇 해 전 우리나라에 문을 연 저가 일본 브랜드의 옷이다. 아주 기본적인 품목과 그 품목의 기본이라 할 디자인으로 겉으로 드러난 상표도 없고 쓸데없는 장식도 없는 옷들이 값도 비싸지 않다.

게다가 갑작스럽게 값을 깎아 팔기도 하고 철 지난 옷은 더 많이 깎아 팔기도 하니 시내 백화점에 그 매장이 처음 생기고 한동안 나는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그곳에 가곤 했다. 마음에 드는 옷이 한정 세일을 하지 않는지, 싸게 살 기회를 놓치게 되지 않을지. 놓치면 손해일 것만 같고, 그래서 그곳에 꼭 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은 강박에 가까웠다. 그리고 할인된 옷을 사면 마치 큰 횡재라도 한 듯 뿌듯하기만 했다.

결국 옷장에는 색만 조금 다르지 똑같은 스웨트셔츠, 터틀넥 스웨터, 집업 후드들이 서너 장씩 들어앉게 됐다(살 때는 짙은 회색과 옅은 회색과 아이보리는 분명히 다르다고 스스로를 부추겼던 기억이 난다).

싼값에 물건을 사는 것은 현명한 일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싸기 때문에 물건을 사 봐야 내 지갑 사정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로 운동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니 스웨트셔츠는 집에서 입을 일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너댓 장씩 쟁여 두고 있은들 나중에는 버리기밖에 더하겠는가. 알뜰하게 오래 입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초인적인 수양을 쌓은 사람이나 그럴 수 있을까, 쉽지 않다.

나부터도 ‘옷장만 차지하고 있네. 까짓 얼마나 줬다고, 몇 번 입었으니 본전은 뽑았고, 미련 없이 버리자’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살 때 좀 무리다 싶어도 몇 번을 따져 보고 살펴본 뒤 산 옷은 십 년이 넘게 손 잘 닿는 곳에 놓아두고 중요한 자리면 꺼내 입게 된다.

재고품이나 하자가 있는 물건이 아닌 이상 지나치게 싼 가격은 만드는 과정에서 윤리적 문제가 없을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도저히 저런 값으로는 물건을 만들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면 어디에선가는 착취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조금 값나가더라도 하나를 사 아껴 쓰면 될 형편의 사람이 싼 물건만 찾는 것도 어딘가에서 행해질 착취에 동조하는 셈이다. 물론 옷이나 장신구·화장품 같은 이미지가 중요한 상품의 가격에는 실제 제조원가 외에도 다른 요소가 많지만 생산 과정에서 윤리적 가치를 내세우는 기업과 브랜드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으니 이런 곳에 힘을 실어주는 것도 현명한 소비다.

기왕에 산 옷들은 열심히 잘 입으려고 쉽게 손 닿는 곳에 내놓았다. 내친김에 속옷이나 양말은 얼마나 되는지 세었다. 너무 많다. 역시 싸게 팔 때 사두겠다며 욕심 냈던 결과다. 트레이닝복·속옷·양말, 이런 것들은 당분간 절대 사지 않겠다고 다시 마음을 먹었지만 글쎄, 잘 지킬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예쁜 것, 싼 것, 유행에 앞선 듯 보일 수 있는 것들의 유혹이 그리 쉽게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 않으니.


글쓴이 조동섭은 번역과 출판 기획을 하는 한편 문화평론가로 대중문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앞으로 친환경주의자로서의 싱글남 라이프스타일 기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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