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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청산 막는 '누더기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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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85주년 삼일절은 처참하게 모욕당했다. 이 날을 전후해 일제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특별법이 국회 법사위에서 몇몇 의원에 의해 온갖 학대와 기형화와 출산 장애의 만행 속에서 불쑥 느닷없이 태어나버렸기 때문이다. 도저히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을 지경의 미숙아인지라 당장 인큐베이터 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다.

실로 해괴한 16대 국회다운 최후의 부산물이다. 절대 통과 불가로 대처했던 레바이어턴식 야당과, 의욕은 있으되 힘이 없는 여당의 팽팽한 대결은 애초부터 기형아나 미숙아가 됨을 예견케 했다.

야당은 온갖 구실과 궤변과 억지와 아집과 트집으로 법률안 흠집내기, 누더기 작전 등으로 시간을 끌며 명백한 반대의사 표명 없이 슬그머니 회기를 넘겨 책임지지 않은 채 유산시킬 계략이었다. 이 노회하나 비열한 속셈은 너무나 드센 국민의 항의로 하여금 금배지를 다시 달기 위해서는 '야당도 일제 잔재 청산에 반대는 아니다'는 듯이 보이도록 핍박했다.

아니, 이 정도의 누더기라면 조사위원의 활동이나 연구자들에게 범법의 위하력으로 묶고, 언론매체들의 입에다 재갈을 물릴 수 있으며, 상당수의 권세 높은 친일파를 비호하여, 차후에는 너무나 떳떳하게 애국자로 둔갑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뒤 꿩 먹고 알 먹은 꼴이다. 친일파 청산 최대의 장애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교묘하게 시한폭탄까지 장착시킨 셈이다.

갖은 수모와 역경에서도 일단 통과시키고 보자는 의욕이 앞선 여당으로서는 울며 겨자먹기였을 터이다. 오죽하면 몇몇 추진 의원은 통과 즉시 당장 개정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판국일까.

바로 이 순간에도 일본의 정치인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우리에게 온갖 모욕적인 발언을 되풀이하고 있는 판인데도 대통령의 시의적절한 삼일절 기념사 한 구절을 야당이 일본 외무성이 좋아할 듯한 비난을 퍼붓는 풍토인지라 이 법의 파란만장이 보이는 듯하다. 독립운동가들은 격분하는데, 일본과 친일 세력과 그 옹호자들이 묵인하는 법이라면 그 진상을 알 만하지 않은가.

이 법은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 규명이기에 당연히 신분.계급.재산.신앙 등 어떤 구분도 없이 '행위' 그 자체가 판단의 기준이 돼야 한다.

법률 앞에 만인이 평등하거늘 왜 허황한 논쟁이 필요할까. 반민족 행위 개념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다. 8.15 직후의 모든 법률안과 프랑스의 예를 우리는 전면적으로 수렴해야 할 것이다.

둘째, 개정의 초점은 조사 방법과 관련된 조항들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철저한 조사를 위해서는 담당자들에게 그만한 권한과 신분 보장과 국민적인 신뢰성을 실어줘야 하며, 피조사자나 이와 관련된 대상에게는 반드시 협조할 의무를 부여해야 된다.

셋째로는 각종 연구조사 활동과 그 결과물에 대한 처리문제다. 이 법 취지를 살려 범국민적인 홍보와 교육에 널리 활용토록 보장해야 하며, 아울러 친일파로 규정된 자에 대한 각종 포상.훈장 반납과 그 명의의 기념행사.기념관 등을 일절 금지하는 조항이 반드시 추가돼야 한다. 미숙아의 운명은 이제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