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행복한책읽기Review] 속도는 ‘행복한 질주’일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템포 바이러스
페터 보르샤이트 지음, 두행숙 옮김
들녘, 560쪽, 2만7000원

“시간은 삶이다. 그리고 삶이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간을 절약하면 할수록 그것을 더 조금 갖게 된다.”

미하일 엔데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 모모가 남긴 말이다. 서두를수록 황폐해지는 삶의 속성에 딱 맞는 묘사다. 하지만 세상은 시간을 절약해 남보다 더 빨리 일을 해치우는 쪽에 ‘승자’의 메달을 걸어준다. 독일의 사회·경제학자인 저자는 “부유한 나라일수록 국민들이 움직이는 속도와 박자도 빨라진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옛것을 고수하려고 하면 센스 없는 사람이 되고, 최신기술에 합류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다. 또 식사를 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지 않으면 게으름뱅이가 되고, 몸을 편히 기대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잠재적인 실업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만큼 현대인은 ‘속도의 압박’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지배한 속도의 문화사’를 표방하고 있는 이 책은 인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느린 것을 참지 못하는 ‘속도의 문화‘에 길들여지게 됐는지 파헤쳤다.

인류 역사에서 ‘빠른 속도’가 미덕인 기간은 의외로 짧다. 농업사회에서는 서두르는 것이 낯설었다. 아무리 서둘러봐야 곡식이 여무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는 없으니, 자연이 부여하는 생장의 리듬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게 당연했다. 시간관념도 지금과 달랐다. ‘진보’를 지향하는 직선적인 시간관념 대신 계절이 돌 듯 모든 것은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돌아온다는 순환적인 시간관념을 가졌다. 그래서 아무리 속도를 내도 자기 힘만 빠질 뿐 목표에 더 가까워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느림의 신조는 예술 분야에도 자취를 남겼다. 그레고리 교황시대의 송가에는 ‘시간 개념’이 없다. 속도나 리듬 없이 교회 안을 천천히 맴돌며 울리는 노래였다. 건축도 그 느림의 미학에 어울리도록 설계됐다. 당시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와 고딕 양식 교회들은 일부러 긴 시간에 걸쳐 소리의 여운이 울려퍼지는 음향효과를 내도록 건축됐던 것이다.

가속이 성공의 비결로 자리잡게 된 데는 15세기 원거리 무역상의 역할이 컸다. 상업은 농업과 달리 속도를 낼수록 이익이 커지는 업종이었다. 무역상들은 상품을 더 빨리 선적하고 하역할 수 있도록 빠른 배를 만들어달라고 조선소에 주문했고, 더 빠른 이동을 위해 도로를 만들고 다리를 놨다. 또 더 빨리 정보를 주고받도록 파발꾼들을 독촉했다.

그 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속도의 원칙은 생산 공장에서부터 일반 가정의 주방은 물론 교통·통신 분야를 거쳐 미술과 스포츠·영화·음악 분야에까지 파고들었다.

저자는 이런 가속화의 추진력으로 ‘경쟁’을 들고 있다. ‘남보다’ 더 빨리 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속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가치가 됐고, 목적이 돼 버렸다. 뭘 위해 빨리 하는지는 잊고 무조건 빨리 하는 것이 가치를 두는 것. 세상이 ‘집단 조급증’에 휘둘리게 된 셈이다.

책은 이런 속도의 경쟁에 시달리며 불행해진 인간의 삶에도 눈길을 돌린다. ‘속도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매일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빽빽하게 채우기 위해 아등바등한다는 것이다. 또 “속도의 특권 계층에 속하고 싶은 욕망은 일상생활에서 더 빠른 자동차, 더 빠른 컴퓨터를 사기 위해 돈을 벌도록 끊임없이 강요한다”고 진단한다. 가속화 중독의 징후도 있다. 속도가 빠른 컴퓨터에 익숙해지면서 가족들 사이의 느리고 장황한 대화를 감내하기 힘들어진 게 그 한 사례다.

삶의 속도를 늦춰 천천히 인생을 즐기자는 ‘느리게 살기’가 범세계적인 사회운동의 하나로 떠오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저자는 공감을 표한다. 속도의 상승에는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는 데는 시계가 필요 없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주는 혜택을 이용하는 것이다”라고 충고한다. ‘앞만 보고 달리기’가 여전히 미덕인 우리사회에서 되새겨봐야 할 메시지다. 


이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