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제2부 불타는 땅 꽃잎은 떠 물위에 흐르고(21) 명국이 아저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요.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만한 사람이 못되는 걸 잘 압니다만,그래도 아저씨는 다리 하나 없으면 남은 하나로 살지요.그런데 나는 말입니다.나는 몸 뚱이가 없어졌다,그 말 아닙니까.
먼저 가는 년이 무슨 남겨두고 갈 말이 있느냐고 하시겠지요.
그래도 왜 이렇게 허전한지,아저씨에게라도 몇 마디 하고 가고 싶은 걸 어쩌지요.
화순이 자신에게 남긴 유서를 떠올리며 명국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이 세상에서의 고생도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죽어서 몸이라도 조선,고향땅이 아니더라도 조선 어느 바닷가 기슭에 닿기를 바라면서,아저씨 저 먼저 갑니다.
저무는 바다 위를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목발을 짚고 우뚝 서서 명국은 핏빛으로 물드는 저녁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며 어금니를 물었다.화순이 이년아.한이,한이 남아서 어쩐단 말이냐.어금니를 더욱 힘주어 무는 명국의 눈에 눈물이 흐르 고 있었다.
길남이는 약속을 했습니다.꼭 돌아온다고 말입니다.아저씨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만 저도 그 말을 믿었습니다.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그리고 그 남자는 꼭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저도 듭니다.돌아올 걸 아는데 왜 죽을 생각을 하느냐고 하시겠지요.아마 이런 글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도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일 겁니다.저는 그 남자가 돌아올 것을 믿기에 죽기로 한 겁니다.못난 생각이지만 이것만은 아저씨도 믿어 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그 남자가 돌아왔을 때 제가 어떻게 그 남자 앞에 설 수 있겠어요.저는 그렇게는 못합니다.그러나 또한 이렇게 살지 않고는 달리 살아낼 방법이 없습니다.내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그 남자를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제가 무엇을 해야할까요.이 화순이가 가장 깨끗이 사는 길은 그렇답니다.이제 그만 죽는 일이랍니다.
독한 마음으로 죽을 생각을 하는 게 아니랍니다.그 사람 품에안기듯이,그냥 조그맣게 아주아주 약해져서 저는 죽을 생각을 하는 거랍니다.
아저씨한테 몹쓸 짓도 많이 했지요.말은 또 얼마나 막 했는지.못된 게 어디서 나쁜 것만 배웠다고,그렇게 웃으시면서 잊어 주십시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