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보증금 없는 보석 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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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법원에 보증금을 내지 않고 보석(保釋)으로 풀려난 뒤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는 첫 사례가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4부가 피고인 5명에게 “재판에 성실히 출석하고 증거를 인멸하지 않겠다”는 등의 서약서만을 받고 보석을 허가했다. 우리는 이 같은 결정이 많이 나와 불구속 재판 원칙이 지켜지고, 피고인의 인권 보호와 방어권 행사가 적극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이번에 풀려난 5명은 올 1월 1일부터 시행된 개정 형사소송법의 첫 수혜자들이다. 새 형소법은 돈이 없을 경우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아야 하는 비합리성을 개선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사법개혁추진위원회의 제안으로 피고인의 출석을 보증할 만한 금액을 납부해야만 석방될 수 있는 조항(구 형소법 제98조)을 바꾼 것이다. 재판에 성실히 임하겠다는 서약서나 출석보증서 등을 제출하기만 하면 보증금을 납부하지 않고도 보석이 가능하도록 석방 규정을 다양화한 것이 특징이다. 구 형소법의 보석 조건은 생계가 막막한 피고인들에게 분명히 불리한 조항이었다. 그래서 시중에 ‘무전유죄 유전무죄’나 변호인이 피고인 석방을 이끌어내고 받는 수천만원대의 ‘성공보수’라는 말까지 떠돌았다. ‘전관예우’라는 말과 함께 갓 퇴직한 판검사를 찾아가 변호를 의뢰하는 행태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같은 용어와 관행은 사법부 불신으로 이어졌다.

재판부는 “이들 5명이 강도나 살인이 아닌 재산 관련 범죄자들이고, 일부는 범행 가담 정도가 낮아 집행유예가 예상된다”고 보석 허가 이유를 밝혔다고 한다. 뒤집어 말하면 집행유예 선고가 예상되는 피의자를 구속기소했다는 것이 된다. 차제에 구속 자체가 일종의 처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수사 관행도 고쳐져야 한다. 모든 혐의자는 재판에서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원칙이 존중되어야 한다. 사법정의 구현에 불구속 수사 및 재판을 통한 피의자·피고인 인권보장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