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중견기업] 21세기 ‘모세의 기적’ 꿈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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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균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가 서울 수서동 본사 1층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김성룡 기자]

홍해를 마주 보고 있는 예멘과 지부티에 올해부터 ‘빛의 도시’로 이름 붙여진 대규모 신도시가 조성된다. 중동 쪽의 지부티에 새로 조성될 도시 규모는 서울의 2.5배, 아프리카 예멘에 건설될 도시는 서울과 맞먹는 크기다. 빛의 도시에는 국제공항과 항구를 비롯해 홍해를 끼고 도는 해양레저단지가 들어선다. 아랍에미리트에 들어선 두바이가 중동 내륙의 중심지라면 이곳은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잇는 중동의 물류 중심지를 표방한다.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게 될 이곳의 마스터플랜은 국내 건축설계업체가 맡았다. 희림종합건축사사무소가 세계적인 업체들을 물리치고 설계권을 따낸 것이다. 정영균 대표는 “빛의 도시 프로젝트를 추진 중인 중동투자개발사(MED)로부터 마스터설계권만 370만 달러에 수주했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마스터플랜을 짠 만큼 신도시에 들어설 국제공항이나 항만시설, 랜드마크가 될 주요 건축물 등의 추가 설계권까지 따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업계에선 설계권에 이어 국내 건설사들이 시공권도 수주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MED가 희림에 설계권을 맡긴 것은 신도시 설계 경험에 높은 점수를 준 것. 또 신도시 건설 경험이 많은 국내 건설회사들이 주거·공항·레저단지 등의 조성 공사에 참여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희림은 강원랜드 스키장, 성남판교 4·9단지 아파트, 서울 상암 월드컵단지, 인천국제공항과 서울 명동 중앙우체국청사 등을 설계했다. 설립된 지 38년이 된 이 회사는 매출액 기준으로 국내 1위를 달리고 있다. 900여 명의 전문 설계사를 두고 공공건축물이나 신도시 조성 등에 필요한 모든 단계의 건축 설계를 한다.

커다란 빌딩을 지을 때 우선 외형 디자인을 담당하는 개념·기획설계가 필요하다. 또 이 설계도를 가지고 건축주나 개발사업자로부터 설계권을 수주해야 한다. 수주를 하면 건축물의 골재부터 창호부까지를 짜는 기본설계, 층간 구분과 배선 등을 그리는 실시설계, 빌딩 외곽의 조경 설계 등이 뒤따라야 한다. 희림은 이 같은 단계별 분업시스템을 모두 갖춰 제조업체가 생산라인에서 공산품을 찍어내듯 설계도를 그려낼 수 있다. 희림이 연간 국내외의 크고 작은 300여 건의 건축물 설계를 소화할 수 있는 비결도 이 같은 분업시스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희림은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의 좁은 설계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해외시장에 적극 진출해 왔다. 정 대표는 “10여 년 전부터 중동과 베트남·아제르바이잔 등에 사무소를 설립하고 현지의 우수 인력을 적극 채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도 미국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설계사 2명을 영입해 해외 인력만 20명 정도 된다”며 “특히 건축은 문화이기 때문에 해외 현지의 문화를 이해하는 우수 인력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희림은 지난해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수도 바쿠에 건설 중인 33층짜리 7성급 호텔의 설계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이슬람교에서 중요시하는 초승달 모양으로 디자인한 것이 주효했는데 이 아이디어가 현지에서 채용한 설계사로부터 나왔다. 희림의 해외 시장 개척은 2000년대 초반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해 지난 4년간 연평균 25% 이상의 매출 성장을 일궈냈다. 특히 지난해에는 해외 수주액이 전년보다 무려 7배 정도로 성장하는 기록을 세웠다.

희림은 세계적인 설계회사로 입지를 굳히며 글로벌 톱10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올해 초 유럽의 건축 잡지인 빌딩디자인에서는 매출액 기준으로 희림을 일본 닛켄 셋케이(日建設計)에 이어 아태지역 설계업체 중 2위로 꼽기도 했다. 하지만 희림의 매출액은 1억2700만 달러로 닛켄 셋케이 매출액(3억8900만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정 대표는 “해외 매출 비중을 50%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1차 목표”라며 “세계무대에서 경험을 축적해 명성을 쌓아가면 충분히 10위권에 진입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글=장정훈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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