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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汎현대 결속 구심점 정상영 KCC 명예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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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2003년 11월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의 부인 김월계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경기도 양평 장지에 간 정상영 KCC 명예회장. [서울=연합뉴스]

최근 범(汎)현대가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다. 한라가 만도를 되찾아오는 데 성공하는 한편 현대중공업과 KCC는 태양광 사업을 함께하기로 했다. 지난해 말엔 서울 계동 현대자동차 사옥 앞에 ‘現代(현대)’ 표지석이 슬그머니 제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이런 변화의 구심점에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있다. <편집자>

“라비타 회장님.” 2003년 정상영(72) KCC 명예회장은 임직원들 사이에서 이렇게 불렸다. 운전기사 딸린 에쿠스 리무진을 놔두고 소형차인 라비타를 타고 다녀서다. 그 사연은 이렇다.

그해 여름 대북 송금 특검을 받던 정몽헌 현대 회장이 자살하자 현대그룹은 정 회장의 미망인 현정은 회장이 그룹 경영 일선에 나섰다. 정상영 명예회장(당시 회장)은 이에 반발해 “현대는 정씨 집안이 일군 회사”라며 현대그룹의 지주회사인 현대상선을 인수합병(M&A)하겠다고 나선다.

뉴스 메이커로 정 명예회장이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어느 언론도 정 명예회장과 속 깊은 인터뷰를 할 수 없었다. 서울 서초동 KCC 사옥에서 기자들이 진을 쳤지만 납작모자(도리우치)를 눌러쓰고 라비타를 손수 몰고 다니는 정 명예회장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KCC의 한 임원은 “정 명예회장은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왕회장(고 정주영 명예회장)을 빼닮았다고 해서 ‘리틀 정(鄭)’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아주 치밀한 성격”이라고 말한다.

정 명예회장은 고(故) 정주영 회장의 막내 동생으로 스물한 살이나 터울이 진다. 정 명예회장이 KCC(옛 금강스레트공업)를 세운 것은 1958년. 그의 나이 22세 때다. 범현대가에서 가장 먼저 독립했지만 주위에선 “누구보다 현대에 대한 애정이 강하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조카인 정몽구·몽헌 형제가 경영권 다툼을 벌인 이른바 ‘왕자의 난’ 당시 정몽구 회장 쪽에 선 것은 2000년 5월께라고 한다. 현대가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2000년 5월 31일 몽헌 회장 측이 주도해 왕회장이 몽구·몽헌 부자와 동반 퇴진한다고 선언했다. 이날 저녁 서울 인사동의 한 한정식 집에 정상영 명예회장이 정의선(몽구 회장의 장남으로 현 기아자동차 사장) 상무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몽구 회장을 응원하기 위해서다.”

이런 연유로 현대가의 적통(嫡統)임을 자임하는 현정은 회장 측과 갈등이 깊어졌다. 정 명예회장은 법정에서도 “현대그룹의 ‘제3자’ 인수를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정 명예회장의 부인인 조은주씨는 16일 중앙SUNDAY 기자와 만나 “왕회장님 때부터 우리는 모두 화목했다. 단 ‘한 사람’ 빼놓고는 사이가 좋다”며 현 회장을 비난해 옛 감정이 삭지 않았음을 내비쳤다.

이런 가운데 현대가의 ‘재결집’이 재계의 화제로 떠올랐다. 신호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13일 KCC는 현대중공업과 공동 투자해 태양전지 원료인 폴리실리콘을 생산하는 회사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현대중공업 측은 “2005년부터 자체적으로 태양광 사업을 해왔고 ‘실리콘 전문회사’인 KCC와 제휴한 것일 따름”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재계의 해석은 이런 수위를 뛰어넘는다. 현대그룹의 한 전직 임원은 “소 닭 보듯 하던 사이로 지냈던 현대가의 수장들이 5년 만에 손을 잡는 일인데 어떻게 그냥 봐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한라건설이 ㈜만도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 것은 범현대가의 지원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한라와 만도는 정주영 회장의 첫째 동생인 고 정인영 회장이 세운 회사로 만도는 외환위기 당시 매각됐다.

지난달 한라 컨소시엄은 6500여억원을 들여 선세이지로부터 만도를 되샀다. 이 중 2600억원을 KCC가 지원했다. 한라가 1조2000억원을 써낸 KKR을 물리친 것은 현대차의 측면 지원 덕분이다. 만도 제품의 60%를 사가는 현대·기아차가 KKR 측의 납품물량 보장 요구를 거부하자 선세이지는 한라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영 명예회장의 장남인 정몽진 KCC 회장은 최근 “현대가가 공동의 관심사가 있다면 같이 참여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한라의 만도 인수 성공엔 정 명예회장의 뒷받침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지난해 말 서울 계동 현대 사옥 앞에 ‘現代(현대)’ 표지석이 설치됐다. 현대의 상징물처럼 여겨지던 이 표지석은 2002년 현대차가 새 사옥 주인이 되면서 자취를 감췄던 것. 갑작스러운 표지석 재설치는 현대건설 회장을 지낸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과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현대차 측은 “범현대가 모임에서 원래대로 갖다 놓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고만 밝혔다. 어쨌든 5년 만에 햇빛을 보게 된 이 표지석
은 현대가의 재결집 움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TV로 돌아온 왕회장’ 역시 현대가의 화해 분위기를 대변한다. 생전의 정주영 회장이 등장하는 현대중공업 TV 광고는 현대차 계열의 광고회사 ‘이노션’에서 제작했다. 현대중공업 측에선 “광고 시안이 좋아 이노션에 맡긴 것일 뿐”이라며 확대 해석을 부담스러워한다. 하지만 범현대가의 달라진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해 10월 현대중공업이 현대차 주식 1.5%(2107억원)를 샀을 때도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두 회사가 보조를 맞추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재계의 시선은 현대건설 인수전에 모아진다. 최근 박해춘 우리은행장이 “채권은행들
이 옛 주인인 범현대가의 책임을 물어 매각을 늦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현대건설 M&A는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지금까지 현대건설 인수를 선언한 곳은 현정은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 이외엔 두산에 불과하다. 한 유력 그룹 회장은 “현대건설은 (현대) 집안의 회사”라고 못 박았다. 그는 “(현대건설은) 집안 사정이 잠시 좋지 않아 바깥에 나온 것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순리”라며 “다른 사람들(그룹 회장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라며 재계 분위기를 전했다.

현재 현대건설 인수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현정은 회장 쪽이다. 김성만 현대상선 사장은 연초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사업 기반 확대, 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범현대가에선 “노 코멘트”(현대차), “현재까지 검토한 적 없다”(현대중공업), “여력이 없다”(KCC)며 한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중공업은 10조원대 투자 여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KCC 역시 지난해 전환사채 발행을 통해 1조원의 자금을 확보했다. 현대차까지 여기에 공조하면 현대건설 인수 자금 마련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정 명예회장의 행보가 더욱 주목받는다. ‘왕회장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현대건설 M&A 문제를 놓고 집안의 큰어른으로서 그가 ‘조정자’로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리틀 정’을 넘어 ‘포스트 정’의 역할인 셈이다. 범현대가의 재결집을 바라는 그에겐 더없이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상재 기자·유지상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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