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남식의 동물 이야기] 어느 호랑이의 최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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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39면

지난 수년간 우리 사회에서는 국가 지도자의 언행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다. 능숙한 상황 대처 능력, 달변에 자신감 있는 직설어법, 다양한 표정 등 보통 사람들 간의 토론이나 대화에 있어서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수 있는 점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이나 일반인은 당사자의 진정성보다 이 같은 언행 자체에 대해 “막말을 하여 스스로 권위를 떨어뜨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동물도 종에 따라 그들만의 다양한 소리와 몸짓·냄새·흔적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중에서 지도자로 대접받을 만한 언행을 보여 주는 동물이 있다. 25년 전 에버랜드 동물원의 사파리에서 목격한 호랑이의 최후는 지금까지도 가슴속 깊이 남아 있다.

당시 사파리에는 20여 마리의 호랑이가 있었는데 싸움이 일어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사육사들은 지프로 순찰하면서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사고에 대비했다.

그날은 아침부터 호랑이들 간의 우두머리 다툼으로 전운이 감돌았다. 오후가 되어 팽팽한 긴장감이 폭발하여 사육사가 말릴 틈도 없이 순식간에 혈전이 벌어져 그중 한 마리를 나머지 무리가 집중 공격하였다. 이 호랑이는 복부에 심한 상처를 입고 물이 있는 작은 풀장으로 몸을 피했다. 싸움은 끝났고 위급한 사태의 호랑이를 치료하기 위해 직원들이 지프를 동원해 내실로 몰려 하였으나 물속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기를 한 시간여. 풀장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으나 호랑이는 경계를 흩트리지 않고 평소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다른 호랑이들을 먼저 내실로 몰아넣었다. 그때서야 그 호랑이는 물속에서 몸을 일으켜 터져 나온 내장을 끌면서 내실로 향했다. 그리고 자기 방에 들어서자 안심되는 듯 편한 자세로 앉았다. 복부의 상처 밖으로 나온 내장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겼고 출혈이 심하여 온몸은 싸늘하고 창백하였다. 치료를 위해 살피는 동안 호랑이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당당한 자태에서 불과 10분도 안 돼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 호랑이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풀장에 앉아 고통을 참고 위엄 있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던 것이다.

호랑이는 단독생활을 하는 동물이다. 짝짓기 기간에만 냄새와 흔적으로 암수가 만나고 새끼도 2년 정도 되어 혼자 생활할 정도가 되면 어미 곁을 떠난다. 그러나 호랑이는 다른 동물과 달리 혼자 있어도 결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보이는 것은 이러한 위엄이 있는 자세 때문일 것이다.

호랑이는 정숙을 즐기는 야행성 동물이다. 이동과 사냥도 거의 야간에 이루어진다. 사냥할 때는 신중히 목표물에 접근해 일시에 덮치는 습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호랑이가 “어흥” 하며 울음소리를 크게 내고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평상시에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가 “어흥” 하고 단발성 포효를 할 경우는 대부분 상대방을 제압하고자 할 때뿐이다. 그가 소리 없이 밤길을 다니고 사냥하여도 교활해 보이지 않는 것은 평소 조용한 성품이지만 결정적일 때 큰소리를 낼 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호랑이는 큰 체구에 걸맞은 위엄 있는 언행으로 아시아의 열대 밀림에서부터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시베리아 삼림지대에 이르기까지 왕자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새로운 정부의 탄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새로운 지도자는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겠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지도자들의 말을 전폭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조용하고 신중하나 결정적일 때는 단호함으로 해결하는 호랑이의 언행이 지도자에게 필요한 덕목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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