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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종양·췌장염도 업무상 재해 인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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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05면

이모(54)씨는 2006년 7월 30년간의 장기하사 생활을 뒤로하고 군복을 벗었다. 평소 두통과 어지럼증에 시달리다 같은 해 1월 뇌종양(청신경초종) 진단을 받았다. 그는 대전지방보훈청에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고 신청했다. “공병부대에 복무하면서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은 데다 공사 현장 소음에 장기간 노출된 것이 발병 원인”이라는 주장이었다.

법원, 다양한 질환 재해로 인정 추세

그러나 보훈청 측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자라나는 종양이어서 군 복무와의 관련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거부했다. 이씨는 국가유공자 비해당 결정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냈다.

재판을 맡은 대전지법 행정단독 김용관 판사는 모 대학병원 등에 사실 조회를 의뢰했다. 병원 측은 ▶뇌종양의 발병 원인은 유전적 요인 외에 의학적으로 정확히 증명된 것이 없지만 ▶이씨에게 동반 질환이 없고 가족의 병력(病歷)도 없어 유전적 원인은 100% 배제할 수 있다는 내용의 소견을 보내왔다.

김 판사는 11일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환경적 요인으로 종양이 생겼거나 자연적 경과 이상으로 빠르게 증상이 악화됐다고 볼 수 있다”며 원고(이씨) 승소 판결을 내렸다.

최근 법원이 업무상 재해의 범위를 넓게 보고 있다. 의학적으로 명백한 근거가 없더라도 상당한 개연성이 있을 때에는 국가유공자나 유족 보상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질환의 종류가 과거 재해로 취급되지 않았던 뇌종양·급성췌장염·췌장암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5부(재판장 김의환 부장판사)는 지난달 “1년3개월간 열처리 작업을 하다 급성췌장염이 발병했다”며 사망한 A씨의 유족인 안모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 보상금 지급 등 청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A씨는 입사 전 췌장이나 간장질환과 관련된 병력이 없었는데 300도 이상
의 고온 열처리로 시안화나트륨 등 화학 성분들이 수증기로 뿜어져 나오는 작업현장에서 근무하면서 화학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것으로 보인다”며 “췌장염과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에는 원자력발전소에서 24년 동안 일하다 췌장암으로 사망한 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 서울고법은 “방사선과 췌장암 사이에 관련이 없다는 확실한 의학적 근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방사선에 피폭된 사실이 명백한 근로자를 보호할 필요성이 있다”고 제시했다.

간질환을 재해로 인정할지를 둘러싼 논란도 관심이다. 지난해 1월 서울행정법원은 “과로나 스트레스로 B형 간염이 간암으로 악화돼 숨졌다면 업무상 재해로 보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이 ‘과로·스트레스가 간질환을 발병·악화시킨다는 명백한 근거가 없다’는 의학계 의견을 받아들여 간암 등을 재해로 인정하지 않아온 데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당시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는 공식 자료를 내고 “인과관계가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는 대한 간(肝)학회 등 의료계의 전문적 의견을 무시한 판단”이라고 반발했다.

이 판결은 같은 해 10월 서울고법에서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은 과로나 스트레스가 없어도 간암으로 악화될 수 있다”는 이유로 뒤집어져 현재 대법원에서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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