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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을찾아서>"꿈길에서 꿈길로" 서영은 새장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작가 서영은(徐永恩.52)씨가『사다리가 놓인 창』이후 6년만에 장편『꿈길에서 꿈길로』(청아출판사)를 냈다.그동안 서씨는 30년 연상인 김동리씨와의 결혼,김씨의 와병(臥病),김씨 자식들과의 불화로 이어지는 시련의 시간을 보냈다.이번 작품은 서문에서 『이 소설은 나의 울음 섞인 한판 말의 춤,두 번 다시 출 수 없는 그런 춤과 같다』고 밝히고 있듯 그간의 체험을 질료로 삼은데다 전보다 한층 세련된 사유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어 비상한 관심을 끈다.
로드로망(旅路소설)의 형식을 띤 이 소설은 화자인 시사주간지의 여기자 박희주가 연극배우 한진옥과 이라크의 축제에 초대받아동행하면서 겪는 심경변화를 좇아 간다.
30대인 희주는 사랑의 힘을 믿고 결혼했으나 남편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위기의 여자다.한진옥은 『51세,강릉태생,44세때 화단의 상처한 원로화가와 결혼해 세인의 화제가 되었음.
4년 뒤 화가가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껏 투병중이고 재산문제 때문에 자식들과의 싸움으로 또다시 떠들썩한 스캔들에 휩싸임.화가와의 관계가 드러난 것은 4년전이나 24세때부터 연인사이였다고함』이라는 작중 묘사에서 보이듯 서씨 자신을 모델로 만들어 낸인물이다.
희주는 처음에 진옥의 인상을 『나의 상식으론 파격적이고 괴이했다』고 표현한다.그러나 그와 함께 지내면서 이내 『그 인간이풍기는 분위기는 따스하고 밝았다.이 상반된 부조화는 무엇일까』라고 갈등에 휩싸이며 마침내 귀국하는 비행기 안 에서는 『그녀의 육성(肉聲)은 내 삶을 바꿔 놓았어요』라고 적고 있다.
짧은 기간에 한 인간의 삶을 바꾸어 놓은 진옥의 육성.그 소리는 20년 동안 서씨의 삶과 문학이 연주했던 소리들이 하나의육체에 스며 울리는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연상시킨다.
서씨문학의 두 축이라 할 수 있는 끊임없는 활력에의 지향과 삶의 무의미를 단숨에 넘어서려는 절대적인 정신의 추구는 비로소한진옥이라는 인물 속에서 합일을 이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우러른 채 맨발로 춤을 추며 사막을건너가는 댄서의 피.진옥은 「운명의 수임(受任)」을 통해 이 피를 수혈받는다.
서씨의 목소리를 함축하는 운명의 수임은 현실을 체념하며 받아들이는 팔자론이나 恨의 정서와는 다르다.한은 좌절된 욕망이 고인 슬픔의 웅덩이 속에서 삶을 견딘다.그것은 방패밖에 없는 삶과의 싸움이다.운명의 수임은 창과 방패가 어우러지 는 싸움이다.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냉정한 자각을 통해 허무를 야기하는과장된 욕망과 억압의 폐쇄회로를 넘어 새로운 지평에서 삶을 재구성하자는 이야기다.
진옥은 이미 그 문턱을 넘어간 사람이다.그는 정신과 육체,선과 악,꿈과 현실,남성과 여성 같은 이항(二項)대립적인 기준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세파에 할퀼 대로 할퀴어 한밤중 홀로 욕실에서 오열할 수밖에없는 슬픈 운명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치료비가 없어 애태우는 양치기에게 선뜻 2백달러를 쥐어 주는 맑은 심성과 호기심에 가득차 사막을 혼자 달려가는 열정.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서씨는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형의 인간이기도 한 한진옥의 삶의 방식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의 욕망과 꿈과 한계를 정직하게 인식하면 정신을 뒤덮었던 욕망의 거품이 걷히지요.이때서야 막연한 상실의 공포로부터 해방돼 거침 없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나 싶어요.한진옥은삶에 대한 강한 확신 덕분에 버릴수록 활력를 얻 는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그건 초월보다는 자신에로의 회귀에 가깝지요.』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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