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단>경수로 마찰-北美 고위회담 다시 열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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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북한과의 외교협상은 입구와 출구가 가장 어렵다.』北-美 고위급회담 미국측 수석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美국무부 핵대사가 한말이다.그에 따르면 북한은 협상 시작단계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기어려운 제안을 내놓고 상대가 양보하면 그에 따라 장 애물의 높이를 낮춰나간다고 한다.이렇게 해서 합의단계에 이르면 또다시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내놓는다.
지난달 27일 끝난 베를린 경수로 실무회담이 합의를 눈앞에 둔 상태에서 조기종결된 것도 북한의 이같은 외교전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북한은 목표시한인 오는 21일까지 경수로 공급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핵개발을 재개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협상의진행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한국형 경수로」명기(明記)를 둘러싼문제다.韓.美.日 3국은 한국형 명기를 요구하고 있다.그러나 북한은『한국형 경수로는 없다』면서 이를 거부하고 있다.
경수로를 둘러싼 혼란은 지난해 10월 제네바 北-美 기본합의자체에 있다.합의문에는 공급되는 경수로 노형(爐型)과 구체적 지원범위 등이 명시돼 있지 않다.
당시 갈루치 수석대표는 세부사항까지 완전 타결될 때까지는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빌 클린턴대통령이 서명을 서두르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클린턴대통령으로서는 11월 중간선거 실시 전에 가시적(可視的)외교성과가 필요했다.
외교협상도 일종의 게임인 이상,북한의 요구를 부당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한국이 한국형을 고집한다면 체면상 북한이 반대할 것이라는 건 예상된 일이었다.지금 韓.美.日 3국이 한국형 명기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북한은 새로운「외교카드」 를 얻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실리보다 체면을 앞세우는 남.북한의 가치관으로 볼때 한국형을 둘러싼 체면싸움의 해결이 간단치 않을 것이다. 일본의 연립여당 방북단은 지난달 28일 평양에서 북한과 수교협상을 재개키로 합의했다.그러나 北-美협상이 난관에 봉착하고,남.북한 대화 전망이 밝지않은 상황에서 한국과 미국이 수교협상 재개합의에 신경쓰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은 인식해 야 한다.수교협상 재개 시기를 정함에 있어 남북대화와 北-美 협상 진행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하는 신중한 배려가 요망된다.
경수로를 둘러싼 문제는 北-美 고위급회담에서 합의문내용을 애매한 상태로 남겨둔 데 근본원인이 있다.따라서 양측 수석대표인갈루치와 강석주(姜錫柱)는 고위급회담을 다시 열어 합의내용을 구체화하고 타협을 이뤄내는데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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