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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83. 송년통일음악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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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평양민족음악단이 1990년 12월 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하고 있다.

 남북 교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주의라고 생각한다. 한 번 가면 한 번 오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둘 사이에 똑같이 무엇인가가 오간 예는 아주 드물다. 사람이나 물자 모두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시작한 일이 1990년 ‘송년통일음악회’다. 그해 10월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나를 포함한 남측 음악가 17명이 다녀왔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북측 연주자들도 초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측 방북단 규모의 두 배 수준인 30여 명으로 이루어진 ‘평양민족음악단’을 서울에 초청키로 했다. 불과 두 달 동안 초청장과 답신이 오갔다. “우리도 북에 갈 때 모든 인적 사항을 줬으니 북측 연주자들의 신상도 정확히 보내주세요.” 판문점 연락관을 통해 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북에서 온 정보는 연주자들의 이름과 성별, 그리고 맡고 있는 악기뿐이었다. 베일에 싸인 땅과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 초청을 비교적 흔쾌히 받아들여 12월 9~11일 예술의전당과 국립극장에서 모두 세 번의 연주회를 열었다.

서울에 막 도착한 이들이 첫 리허설을 하고 있던 예술의전당을 찾았다. ‘아!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사회자가 “여러분”하면서 감정을 잔뜩 넣는데 ‘이러다가는 청중석에서 웃음이 터지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무성영화 시절 변사의 과장된 말투를 떠오르게 했기 때문이다. 북한 예술인들을 이끌고 단장 자격으로 온 성동춘씨를 만났다. 북측 자존심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럽게 “저 사회자의 말투를 내가 조금만 지도해도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예상과 달리 굉장히 좋아하며 오히려 부탁한다고 했다. 나는 사회자와 단둘이 한 의상실로 들어가 평양식 말투는 그대로 유지하되 감정을 조금만 빼면 좋겠다며 오랜 시간 지도했다. 너무 서울식으로 바뀐 사회는 오히려 신선치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 차례 송년음악회는 모두 1, 2부를 남과 북이 각각 나눠 맡는 식으로 진행됐다. 이 음악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은 나는 남북 간 실력 대결로 행사가 변질되는 것을 가장 걱정했다. 그래서 북측 리허설 현장에 꼬박꼬박 찾아가 보완해 주는 식으로 내 걱정을 표현했다. 남한 땅을 밟지 못한 작곡가 윤이상씨도 “이 음악회는 노래자랑이 아닙니다. 경쟁하지 맙시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내게 보내왔다.

북측 예술인 가운데 특히 명창 김진명씨의 서도민요는 스케일이 아주 크고 우람했다. 슬프고 한스러운 줄만 알았던 서도민요의 진수를 보여줬다. 이처럼 송년통일음악회는 음악 경연이 아닌 진정한 음악 교류가 됐다.

어려움도 많았다. 그들이 제작해 온 포스터는 한반도 위에서 한 여성이 가야금을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남한 당국은 이 포스터를 붙이지 못하게 했다.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북측 연주자들이 서울 시내 대학들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지만 일체 불허했다. 당시 남한 정권을 비판한 학생들의 플래카드와 구호들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치는 어려웠고, 음악은 따뜻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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