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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고수’에 대한 강박을 버려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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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 20면

와인은 이제 ‘시대의 교양’이 됐다. 외국 귀빈 접대를 위해 1988년 서울올림픽 즈음 수입되기 시작한 와인은 90년대 말부터 대중의 관심을 끌더니 이제는 ‘알면 스타, 모르면 애타’는 존재가 됐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고위 임원들이 오죽하면 ‘와인 스트레스’를 호소할까. 새로운 문화는 새로운 태도를 낳는다. 한국 남자는 ‘포도주’ 아닌 ‘와인’에 적응하면서 실로 다양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거기엔 ‘과도기의 치기’도 있다. 똑같이 와인을 즐기지만 여자는 좀 더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반면 남자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 이유?

우선, 누가 수컷 아니랄까 봐 드러내는 경쟁심과 공명심이다. 와인 동호회에 나가 보면 새로운 사람들과 다양한 관점을 나누며 와인을 즐기기보다 자기 자랑으로 정신 없는 남자들이 있다.

“내가 20세기 최고라는 샤토 무통 로칠드 1982년 빈티지를 마셔 봤는데 와, 아로마가 장난이 아냐.” “『신의 물방울』보니까 다 내가 마셔본 부르고뉴 와인들만 나오더라고.” 가격과 명성과 빈티지와 희소성을 앞세워 자기 자랑에 열 올리는 남자는 처음에 반짝 스타로 부상할지 몰라도 갈수록 같이 건배할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진다. 와인을 마실 때조차 충성심과 하인 근성에 포박된 남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이 와인이 우리나라 최고 CEO가 임원들한테 선물로 돌렸다는 이탈리아 와인 아닙니까. 그 얘기 듣고부터 전 이것만 마셔요.”

한편에는 이런 태도를 우습게 보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대개 관학파, 혹은 원리주의자다. 와인 입문서 서너 권쯤은 이미 독파했고, 이젠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의 책을 읽으리라 마음먹고 있는 그들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주역』을 대하듯 엄숙하고 소중하게 와인을 마신다. 책에 나온 ‘그대로’ 소믈리에가 내미는 코르크 냄새를 맡고 흰색 테이블에 와인 색깔을 비춰본 다음, 잠든 와인을 깨우기 위해 와인 잔의 다리를 쥐고 적당히 흔들어 코로 향기를 맡는다.

그러고서 적당량을 머금고 ‘후룩후룩’ 소리를 내며 입 안에서 와인을 굴려 타닌과 구조감과 숙성도와 피니시를 점검한다.
이런 태도가 강박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정반대의 강박에서 나오는 태도도 있다. 와인을 둘러싼 예절과 지식과 신화를 애써 폄하하는 태도다.

그런 남자들은 ‘정작 프랑스인은 와인 잔의 다리가 아닌 몸통을 감싸 쥐고 벌컥벌컥 편하게 마신다’고 주장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와인을 마시는 게 최고’라고 외치면서 와인 속물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거기엔 일리도 있지만 과장도 있다. 그가 얼마나 다양한 와인 문화를 접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장 멋있고 세련된 태도를 가진 남자는 어떤 강박과 욕심도 없이 와인과 와인이 선물하는 시간을 자연스럽게 즐긴다. 과도기를 기특하게 지나 성장기·숙성기에 도달한 그를 빛나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균형감’이다. 그러자면 와인을 알아야 한다. 와인을 몰라야 강박도 욕심도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직·간접 경험을 고루 쌓은 사람들이 초탈하게 와인을 즐긴다. 그렇다고 남자 모두가 와인 고수가 돼야 할 필요는 없다. 그 또한 강박이다.


현직 남성 잡지 기자인 송원석씨는 ‘신사, 좀 노는 오빠, 그냥 남자’를 구분 짓게 하는 ‘매너’의 정체를 파악, 효과적인 정보를 소개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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