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장규 칼럼

행정수도, 수도 그리고 천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충청도의 땅값 오름세가 장난이 아니다. 새 서울의 유력한 후보지라는 충남 연기군 공시지가는 82%나 올랐단다. 과연 수도가 충청도로 옮겨가긴 가는 건가.

지지난해 대통령선거 때 행정수도 이전 문제가 처음 제기될 때부터 나는 시큰둥했다. 하도 엄청난 일이라서 어차피 성사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던 것이다. 말을 꺼낸 대통령이 체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얼버무리다 말겠지 했다. 그런데 웬걸. 집권 초부터 낌새가 심상치 않더니 청와대가 진두지휘에 나섰고, 급기야 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하기에 이르렀다.

*** "천도다" "아니다" 시비는 난센스

일견 노무현 대통령이 큰소리 떵떵 칠 만도 하게 됐다. 반대하던 거대 야당까지 찬성해 관계법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무슨 시비냐는 것이다. 일리있는 주장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선거 때 행정수도의 중부 이전을 정면으로 반대했고, 그것은 분명한 당론이기도 했다. 민주당 안에서도 반론이 있었으나 그땐 한 식구였던 노무현 캠프의 선거전략인지라 잠자코 넘어갔다. 그랬던 것이 한나라당.민주당 할 것 없이 반대나 견제는커녕 몽땅 수도 이전 찬성으로 돌아섰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반대하던 야당까지 찬성했으니 수도 이전은 전 국민적 합의로 봐야 한다는 게 대통령 말씀인데, 과연 그런가 말이다.

그 내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해 11월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의 저녁 자리에서 오간 대화 한 토막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정부가 수도 이전 관련법을 국회에 올렸는데 한나라당은 어쩔 건가요.

"그거야 물론 찬성해야지요."

-당론으로 정해진 겁니까.

"그럼요."

-그동안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생각이 바뀐 겁니까.

"그런 건 아니고, 일단 총선을 넘겨야 할 것 아니오. 수도 이전 반대하면 총선에서 충청도는 전멸이오."

-그럼 정책엔 반대하고 법은 통과시킨다는 겁니까.

"순진하긴. 법 통과됐다고 다 하나. 예산을 안 주면 못할 것 아니오. 일본도 법 통과시켜 놓고 14년이 지났지만 아무 것도 안 됐어요. 걱정하지 마시오."

과연 최병렬 대표가 공언한 대로 얼마 있다가 국회는 아무 시비 없이 관련법을 통과시켰다. 토론다운 토론 한번 없었다. 대통령이 강조해 마지 않는 국민적 합의의 실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어이없는 일 아닌가.

더 어이없는 난센스는 천도(遷都) 시비다. 행정수도는 괜찮고 천도는 안 된다는 식의 논란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대통령의 말부터 화근이었다. "수도 이전은 천도가 아니라 수도권 기능의 극히 작은 기능 이전"(1월 14일)이라고 했다가 "새 세력이 국가지배를 터잡기 위한 천도 필요"(1월 29일)운운하며 벌집을 쑤셔놓더니, 다시 "천도는 아니다"(2월 24일)로 정정했다. 덩달아 야당들도 행정수도 이전은 몰라도 천도는 안 된다며 펄펄 뛰고 있는 것도 어이없기는 매일반이다.

긴가민가해서 사전을 찾아봤다. 수도란 한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도시. 따라서 수도와 행정수도는 같은 말이다. 천도는 도읍을 옮김이라고 되어 있는데, 도읍은 수도(서울)와 같은 말이니 결국 행정수도 이전이나, 수도 이전이나, 천도는 모두 동의어들이다. 그렇다면 이 무슨 공허하고 엉뚱한 논쟁인가.

*** 지금이라도 원점서 다시 논의를

다시 정리해 보자. 수도 이전 계획의 근본적인 맹점은 그 태생이 선거에서 출발했고, 여전히 정치적 흥정의 대상물로서 계속 꿈틀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충청도 표의 힘으로 수도 이전 정책이 밀어붙여지고 있는데, 순서를 바꿔 서울.경기 표가 화를 내며 새 정치흥정을 요구할 땐 어쩔 것인가. 코앞 총선 후의 권력구도조차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한국 정치의 현주소다. 더구나 정권이 대여섯번씩 바뀔 상황에서 향후 20, 30년 이상 걸리는 그 장대한 수도 이전 정책의 일관된 추진을 누가 담보하겠나.

더 이상 진도 나갈 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원점에서 다시 논의를 시작하는 게 옳다. 용어부터 헷갈리지 않게 정리하자. 행정수도 이전 계획보다 수도 이전 계획이 더 명확한 용어다. 천도 계획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러고 나서 각자의 입장을 말하자. 나는 반대다. 소득이 1만달러가 넘은 나라에서, 이렇게 생니 뽑듯 수도를 옮긴 사례가 세계에 없다. 수도 이전은 통일한국에 대비해서나 논의할 문제다.

이장규 경제전문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