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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동차100年史>8.1908年 T형 포드 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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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만인(萬人)을 위한 차를 만들 생각이다.그것은 가족이사용하기에 충분히 크면서 혼자서도 손쉽게 타고 달릴 수 있을만큼 작은 것이기도 하다.최고의 재료,최고의 인재를 쓰고 최신의기술을 바탕으로 최대한 단순화시킨 설계로 만들 어 질 것이다.
그러나 가격은 적당한 급료를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살 수 있을만큼 싼 것이다.누구라도 가족과 함께 타고 야외에 나가 신(神)의 축복을 느끼게 될 수 있을 것이다.』(1907년 헨리 포드의 기자회견) 마침내 1908년 10월 세계최초로 대량생산에의한 대중차를 실현한 포드자동차의 「T형포드」가 선을 보였다.
3개월전에 헨리 포드는 45세 생일을 맞았다.모든 면에서 절정기였다.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휘아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몸에 지녔다.지난 10년 가까이 에디슨의 전기회사를 나와 온갖 좌절속에서도 자동차에 몰두해온 경험이 있었던 터다.
특히 40세에 자기이름으로 포드회사를 창업한 뒤 없는 자금을꾸려가면서 기술자에서 기술경영자로 변신하는 과정은 그에 관한 전기물마다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을 정도다.
얘긴 다르지만 일본의 전후 최고기술자로 불리는 故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郎.前혼다사장)도 혼다를 세운것이 헨리 포드와 같은 40세때다.또 재미있게도 두 사람은 나란히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전당」에 세계의 자동차인으로 헌액돼 있다.
헨리 포드는 벨트 컨베이어에 의한 대량생산 방식을 채용,대폭적으로 가격을 낮춰 그때까지 일부 특권계층밖에 손에 넣을수 없었던 자동차를 대중의 것으로 했다.조립라인에 있는 노동자도 차를 살 수 있도록 하는게 포드의 꿈이었다.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T형포드를 샀다.양산효과는 더 올라가고 가격은 계속 떨어졌다.최전성기때는 2백만대가 넘는 라인 업을 이루기도 했다.후속모델인 「A형포드」로 바통을 넘길 때까지 20년간 가격은 3분의1로 떨어졌고 약1천5백만대가 팔렸다.그 사이에 적어도 3천만두(頭)의 말(馬)이 실직했다는 얘기도 있다.T형포드의 등장은 미국인의 생활패턴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 차는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복구차량으로 일본에 몇대가 도입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포드가 성공하게된 배경에는 미국의 공작기계발달,부품의 규격화,표준화등 기술적 요인이 물론 컸지만 빼놓을 수 없는 다른 요인도 있었다.1900년 당시 디트로이트 인구의 약3분의1인 9만6천명이 외국태생이었다.그 3분의1이 독일출신, 약4분의1이영어권의 캐나다인이었다.그외에 주된 이민그룹으로는 1만4천명의폴란드인,6천4백명의 아일랜드계가 끼어있었다.포드자동차에 있어이만큼 엄격한 감독자는 없었다.엔진에서부터 부품,재료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공통적으로 인정받 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다.
한편 1890년대에 미국은 세계적인 농산물붐을 타고 증산을 계속했다.그때문에 생산과잉에 빠져 가격이 폭락했다.농촌의 젊은이들은 돈벌러 도시로 나갔다.그런데 1900년대에 들어서자 경기가 회복돼 이번에는 공급이 수요를 못따라가게 됐 다.
1910년이 되면서 도시에 나갔던 농촌출신의 젊은이들을 불러오지 않으면 안되게 됐다.그 수단으로서 값싼 「T형포드」가 사용된 것이다.즉 자동차를 사면 언제라도 도시에 놀러 나갈 수 있고 또 자동차엔진을 농사일에 쓰면 일이 힘들지 않게 된다는 계산에서였다.이것이 주효했다.게다가 농산물수송때 철도회사의 횡포에 시달려온 농가들이 그 반발로 자동차가 오히려 농산물 수송에 편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포드는 농민이 만든 자동차 왕국인 셈이다.
그러나 대중의 마음은 항상 변하는것.T형포드로 자동차를 갖고싶다는 욕망을 해결한 대중들은 이제 실용적인 차 한대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됐다.뭔가 꿈이 있고 화려한 차가 갖고 싶어진 것이다.이때 대중의 마음이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재빨리 파악하고나선 곳이 제너럴 모터스(GM)였던 것이다.
東京=郭在源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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