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기성세대 블루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7호 35면

수첩을 뒤적이다 보니 앙드레 모루아의 글을 옮겨 적은 게 눈에 띈다.

“나이를 먹는 기술이란 뒤를 잇는 세대의 눈에 장애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존재로 비치게 하는 기술, 경쟁 상대가 아니라 상담 상대라고 생각하게 하는 기술이다.”
그 밑에 옮긴 건 누구의 글인지 모르겠다.

“영광의 공허함을 알고 무명의 한 존재로 편안함을 얻으려는 기분.”

10년 가까이 된 수첩인 것 같다. 아마도 노년에 대한 어떤 책을 읽던 참이었을 게다. 그럴싸한 구절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뒤 글은 근사하고 앞 글은 서글프다. 그 무렵 나는 불현듯, 내가 ‘기성세대’로 지칭되는 그룹에 속한다는 사실을 소스라치게 깨달았다. 오, ‘기성세대’라니! 저와 똑같은 망나니 애들과 어울려 실컷 놀고먹다 깨어 보니 당나귀가 돼버린 피노키오처럼, 나는 내 피부가 이물스러워 물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미치고 팔짝 뛰어도 벗겨지지 않는 가죽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 한참 전부터 나보다 어린 사람들한테 기성세대 취급, 아니, 대접을 받았었다. 단지 그 대접을 소화하지 못하고 토해내곤 했던 것이다. 한 사진전 초대장을 받고 전시장에 갔다가 거기 모인 사람들과 어우러진 적이 있다. 사진작가나 그의 친구들이나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쩐 일로 죽이 맞아 몇 시간이나 떠들고 놀았다. 그런데 헤어질 무렵 한 아가씨가 내게 사근사근 물었다. “선생님은 우리같이 젊은 사람들이랑 같이 놀면 어떤 기분이세요?” 엥? 이게 웬 짱돌인 것이냐! 나는 그들이 나보다 어리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들에겐 내가 ‘선생님’이었단 말인가. ‘댁 나이도 이십대 후반 아니셔? 별꼴이야’ 나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때 내 나이, 서른 중반을 막 넘은 참이었다.

이제는 ‘선생님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떻습니까?’ 하고 제법 대범하지만, 내겐 선생님이라 불리는 데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그 거부감을 트라우마 급으로 만든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한 출판사의 파티 자리였다. 아직 평론가 류철균으로 더 알려져 있던 소설가 이인화씨가 내 근처에 서 있던 소설가 신경숙에게 다가와 자기가 보낸 소설책을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들 대화를 멀뚱멀뚱 듣다가 내가 건성으로 끼어들었다. “나한테는 왜 안 보내줘요?” 말을 꺼낸 직후 ‘괜히 실없는 말을 했구나’ 생각하는데, 류철균씨가 머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선생님도 저한테 책 안 보내주셨잖아요.” 으으, ‘선생님’이라니…. 젊은 사람들 얘기하는데 나이 든 사람이 주책없이 끼어든다고 ‘퉁박’을 먹은 기분이었다. 류철균씨는 내가 한창 젊었을 때부터 (그는 이십대 새파란 초반, 나는 아마도 갓 삼십대) 봐왔기 때문에 ‘선생님 취급’을 받는 게 느닷없었지만, 하긴 나이차를 생각하면 그렇게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설이 코앞이다. 이번 설에는 친척 어른 한 분을 꼭 찾아뵐 생각이다. 내가 마흔 살이 넘도록 뵐 때마다 용돈을 주시던 분이다. 언젠가부터 친척 어른들이 다들 몹시 늙으셨다. ‘기성세대’라는 말엔 더러 부정적인 뉘앙스가 담기지만, 그 두둑한 생활력을 선점한 나이층 이후의 삶, 곧 ‘기성세대 이후의 삶’도 있다. 운이 나쁘면(운이 좋은 건가?) 오래도록 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번 설에 내가 세배와 함께 처음으로 세뱃돈을 드리면, 그분은 웃으시겠지. 가슴 저린 웃음일 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