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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들이 꼭꼭 숨김 검은 돈을 추적하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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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08면

독재자들의 검은돈을 추적하라.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난 수하르토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국제투명성기구(TI)로부터 전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독재자로 지목돼 왔다. TI는 수하르토가 32년 통치 기간 중 150억∼350억 달러를 축재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입증하듯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하르토가 세운 7개의 재단 중 하나에서 4억4000만 달러를 환수하기 위한 민사소송을 벌이고 있다. 이 재단의 기금 규모는 15억4000만 달러에 이른다. 법원 측은 “수하르토가 죽었지만 재판은 계속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하르토 일가(一家)의 검은돈은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독재자는 땅에 묻혔지만 재산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다. 스위스나 조세 피난처, 홍콩·싱가포르 같은 금융중심도시에 거액이 예치돼 있다는 소문, 지분 투자 형식으로 수많은 기업과 금융기관에 분산됐을 것이라는 관측만 무성하다. 자카르타에서는 그의 재산을 추적하는 단체들이 몇 년째 활동을 펼치고 있다. 파지룰 라만이라는 활동가는 “국내외 어딘가에 안전하게 은닉됐다는 전제 아래 추적하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최근 현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수하르토 일가의 남은 재산은 20억∼30억 달러에 불과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1998년 수하르토가 권좌에서 쫓겨난 뒤 가족들이 투자한 돈을 꼼꼼히 챙기지 못하거나 사업 파트너에게 사기를 당해 대부분의 재산을 날렸다고 수하르토 측과 가까운 인사는 주장했다. 수하르토 자신은 정권을 내놓은 뒤 고급 주택가의 목조 주택에서 수수한 생활을 해왔다. 그는 부정축재설에 대해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150억 달러의 재산을 해외에 도피시켰다고 보도한 시사주간지 타임에 명예훼손 소송을 내 인도네시아 대법원으로부터 1억600만 달러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하지만 수하르토의 3남3녀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들은 돈이 되는 분야의 수백 개 기업에 개입해 이권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어느 자식이 어떤 기업을 밀고 있느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엇갈렸다. 그럼에도 수하르토 퇴진 뒤 막내아들 토미만 부패 혐의로 기소됐다. 그나마 2심에선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500억원을 반환하라는 외국계 금융기관과 민사소송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전 세계 독재자들의 재산 중 해당 국가의 정부가 부분적으로나마 환수한 사례는 세 건에 불과하다. 필리핀·나이지리아·페루다.

필리핀 정부가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일부 재산을 환수한 것은 모범 사례로 손꼽힌다. 86년 피플 파워로 쫓겨난 마르코스 일가는 50억∼100억 달러를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아 왔다. 그러나 마르코스가 스위스 은행에 숨겨놓은 6억2400만 달러(원금 3억6000만 달러)를 되찾기까지 17년이나 걸렸다. 이 돈은 마르코스 가족 명의의 6개 예금계좌에 예치돼 있었다. 스위스 법원은 97년 ‘문제의 자금이 불법 취득한 것임을 입증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마르코스의 돈을 필리핀 정부에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이후 필리핀 정부는 마르코스 가족과 6년간 법정 공방을 펼쳐야 했다. 마르코스의 재산을 추적해온 단체들은 90년대 말 ‘스위스에 132억 달러의 예금과 20t가량의 금괴가 보관돼 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 최대 산유국인 나이지리아도 권력자들의 검은돈을 환수하려는 작업이 활발하다. 나이지리아 경제금융범죄조사위원회(EFCC)는 “60년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3800억 달러에 이르는 정부 돈이 횡령 또는 낭비됐다”고 밝힌 바 있다. 5년간 권력을 잡은 사니 아바차는 20억∼50억 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추정된다. 나이지리아는 아바차가 관련된 스위스은행 계좌 등에서 5억550만 달러를 되찾았다.

페루에서 10년간 집권하다 쫓겨난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 대통령과 측근들은 20억 달러가량을 해외에 도피시켰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후지모리가 축출된 직접적 원인은 정보기관 책임자가 하원 의원에게 1만5000달러의 뇌물을 받는 장면이 TV에 보도된 것 때문이었다. 2000년 스위스 은행은 정보기관 책임자의 계좌에 들어 있던 4800만 달러를 동결시켰다. 조세 피난처인 케이먼 군도 역시 3300만 달러를 동결했다. 2년간의 조사 끝에 스위스 당국은 7750만 달러를 페루 정부에 돌려줬다. 후지모리 퇴진 뒤 되찾은 돈은 총 1억8500만 달러에 이른다.

방탕한 생활 끝에 빈털터리가 된 독재자도 적지 않다. 아이티의 장 클로드 뒤발리에는 15년간 집권하면서 3억∼8억 달러를 빼돌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9세 때 아버지에게 종신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았으나 반정부 시위에 밀려 프랑스로 도피했다. 파리·칸 등지에 아파트 두 채, 빌라, 대저택을 사고 고급 스포츠카 페라리를 타고 다니면서 호화 생활을 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로부터 정치적 망명을 인정받지 못한 채 93년 부인과 이혼하면서 대부분의 재산을 날렸다. 올해 55세인 뒤발리에는 침실이 하나뿐인 파리의 한 서민아파트에서 오랫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동거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국제사회에선 요즘 독재자와 부패 공직자의 재산을 추적하는 공조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개도국에서 빼돌린 돈 때문에 주민들의 빈곤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은 지난달 28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반부패 관련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응오지 오콘조 이윌라 세계은행 이사는 “개도국에서 매년 빼돌리는 국부가 연 200억~400억 달러에 이른다”고 말했다. 이는 선진국들이 개도국에 주는 공적개발원조(ODA)의 20∼40%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는 “부패와의 전쟁에 대한 책임은 각국 정부에 있지만 검은돈의 피난처를 봉쇄한다면 더욱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검은돈의 목적지가 되는 금융산업 중심지와 선진국의 역할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유엔과 세계은행은 지난해 9월 개도국에서 유출된 검은돈을 찾아내 되돌려주기 위해 ‘은닉 재산 환수 이니셔티브(Stolen Asset Recovery Initiative·StAR)’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지구촌 차원의 첫 번째 반(反)부패 협정으로 일컬어지는 유엔 반부패협약(UNCAC)에 따른 것이다. 국제사회에선 법적 논란을 명분으로 UNCAC를 비준하지 않고 있는 일본·독일·이탈리아에 대한 압력이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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