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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南道에 몸을 담그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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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32면

1 광주호 수면에 비친 갈대와 하늘. 시린 바람이 수면을 일그러뜨리며 겨울을 그리고 있다

추위가 매섭다. 오버코트 깃을 세워봐도, 핫 초콜릿을 마셔봐도 시린 바람은 어쩌지 못한다. 뜨끈한 아랫목에서 귤을 까 먹으면서 수다를 떨어보거나 찜질방에서 수건으로 양머리를 만들어 써봐도 어째 얄팍한 느낌이다. 종지뼈를 뭉근하게 덥혀주고 현실이 나른해질 때까지 몸을 풀어줄 무언가가 간절해진다. 바로, 한겨울의 온천여행이 존재하는 이유를 발견하는 타이밍이다.

복잡한 도심을 떠나온다는 사실, 맛깔스러운 음식으로 입을 호사시킬 수 있다는 기대가 적당히 몸도 마음도 이완시켜 주지만 차창 밖의 풍경은 을씨년스럽다. 남쪽으로 향하는 동안 굵은 비가 후두둑 떨어져 내리기도 하고 거칠 것 없는 들판을 지난 바람에 차가 거세게 밀리기도 한다. 땅은 얼어 있고, 언 땅 위로는 지난 추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낡은 폐비닐들이 바람에 떠돌기도 한다. 겨울을 견디는 하우스 위로 솟은 연통에서는 온기가 느껴지는 연기가 뻗어 나오지만 ‘바람이 머물다 간 들판에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 연기’ 같은 정감은 없다.

그래도, 여행이 좋은 것은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손때 묻은 브리프케이스 대신 크로스백을 메고, 모니터 대신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는 것이 여행이다. 퇴근해서 몸을 누일 때조차 다음 날의 스케줄을 떠올려야 했던 피곤한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 사람들이 여행을 ‘탈출’에 비유하는 이유다.

2 아시아 최초로 ‘슬로시티(slow city)’에 선정된 담양의 메타세쿼이아길. 잠시 차를 두고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3 담양리조트에는 가족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히노키탕이 준비된 패밀리스파가 갖춰져 있다 4 화순온천의 노천탕. 노천온천에서 즐기는 풍욕(風浴)은 차가운 겨울에 더 매력적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해외여행이 수월하다. 간판의 글자, 귀로 들리는 소리 하나하나가 만들어내는 낯섦이 팔뚝 위의 솜털들을 바짝 세우게 만든다. 하지만 매일 보던 풍경으로부터 시속 80~100㎞ 속도의 자동차로 빠져나가는 여행이라면 뒷좌석에 잡념이 함께한다. 아 참, 아침에 머리 감고 얼굴도 공들여 닦았으면서 정작 이를 안 닦고 나왔구나. 흰 우유 한 컵 따라 마시고 다시 냉장고에 넣었던가. 인터넷 몰에서 주문한 아이크림이랑 손톱 에센스가 오늘 도착한다고 했던가. 사념은 고민이 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포기’에 이르고 그제야 눈이 풍경을 향해 열린다.

담양IC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우측으로 길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길을 따라 도착한 곳은 먼저 담양 온천. 전·현직 대통령도 묵어 갔다는 이곳은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게 손님을 맞는다. 리조트 뒤편으로 야트막한 겨울 산이 금성산성을 감추고 있다. 시간을 내서 올라보는 것도 좋다. 등산시간이 비교적 짧아 수월한 금성산성은 6㎞에 이르는 성벽이 잘 보존돼 있어서 경관이 매력적이다.

성벽에서 내려다보는 겨울 담양의 차분한 산세는 마음을 정화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산에서 내려오면 긴 시간 고대하던 온천욕의 시간. 일드 ‘노다메 칸다빌레’에 고타쓰라고 부르는 일본의 전통 난방기구가 등장한다. 티 테이블 위에 담요를 덮어놓은 것처럼 생긴 고타쓰는 여주인공 노다메가 게으르고 나른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다.

온몸을 매끈하게 감싸는 온천에 몸을 담고 있노라면 이 고타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다메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게 된다. 당장 월요일부터 시작될 새 프로젝트도, 시댁 설 선물 준비도 ‘아무렴 어때’ 하는 심정이 된다. 온천은 이런 의미에서 좋다. 찜질방 따위는 대적할 수 없다.

온천으로 몸이 호사했으면 이제는 입이 호사할 차례다. 죽순이 가득 들어간 불고기나 떡갈비로 기름진 식사를 해도 좋고, 대나무 속에 밥을 지어 향긋한 대통밥과 반찬의 ‘수적 우위’에서 압도하는 남도의 성찬을 맛봐도 좋다. 쏴아쏴아 바람결에 소리 내는 죽녹원에서 대나무 길을 걸어보고 제방 길 위에 있는 ‘진우네집 국수’를 맛보는 것도 좋다. 40년째 한결같이 끓이고 있는, 멸치 우린 국물에 턱턱 담아낸 시장국수에 가마솥 한 가득 쪄낸 달걀을 함께 맛보는 것도 특미다.

슬슬 차를 몰아 시골길을 달린다. 광주호를 따라 달리는 길이 호젓하다. 낮은 품으로 인도하는 남도의 산세를 바라보는데 농밀한 시선 따위는 필요 없다. 소여물 끓이는 시골집 아궁이의 연기가 안개처럼 도로로 밀려든다. 그림자가 쉬고 간다는 의미의 식영정(息影亭)에는 그림자 대신 겨울바람이 머문다.

소쇄원을 지나 화순 방향으로 20분 정도 달리면 화순 온천에 이른다. 다양한 아쿠아 시설을 갖춘 덕분에 온천수 속에서 수중보행이나 스트레칭을 할 수 있어서 온천욕에 재미가 더한다. 튜브 슬라이더 같은 물놀이 기구까지 있으니 어른들의 ‘온천놀이’에 심심했을 아이들을 위한 장소기도 하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하고 떠나는 여행이란 없다. 잠시 ‘일시정지(pause)’해 놓은 것일 뿐. 컴퓨터 키보드에는 ‘포즈(pause)’와 ‘브레이크(break)’가 한 개의 키에 씌어 있지만 현실에서 일시정지만으로 모든 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여행은 현실로부터 시간을 넘어 다른 시간대로 들어갈 수 있게 도울 뿐이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고 그때부터 문제는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온천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이 이것 아니던가.

담양리조트온천
광주에서 20분, 담양IC에서 10분 거리. 16만5000㎡ 부지 위에 대온천탕과 호텔, 수목원, 야외 수영장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의 061-380-5000 홈페이지 www.damyangresort.com

금호화순리조트
광주에서 40분 거리. 200여 개의 객실을 보유한 리조트와 온천욕과 함께 다양한 수중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는 아쿠아나 시설을 갖추고 있다. 문의 061-372-8000 홈페이지 www.kumhoresort.co.kr


글쓴이 이은석씨는 전직 중앙m&b 기자로 건축, 인테리어와 같은 리빙 디자인과 사진에 관심이 많은 프리랜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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