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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민주주의가 있는 한 좌파는 죽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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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더 레프트(The Left) 1848~2000
제프 일리 지음, 유강은 옮김, 뿌리와 이파리, 1028쪽, 5만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된 뒤 전 세계는 이념의 혼란 속에 살고 있다. 공산주의의 종언은 곧 반공주의의 종언이기도 해 이를 근간으로 체제를 꾸려왔던 양 진영이 동시에 좌표를 잃었기 때문이다. 대립에서 오는 긴장과 위험이 훨씬 완화됐을 뿐만 아니라 공존공영의 무드가 조성됐다는 점에선 긍정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는 곧 역사발전의 추동력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반드시 박수를 칠 일만은 아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은 공산독재와 맞대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 같은 논의가 다소 낯설지 모른다. 하지만 ‘독불장군’이 된 자본주의가 양극화의 심화 등을 더욱 부추겨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에 비춰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내야만 하는 것은 이 시대의 소명이자 절박한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현재 거의 생명을 다 한 듯이 보일지라도 좌파(左派)의 역사를 되짚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시도는 의미가 있는 일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좌파가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좌파는 온건한 사회민주당에서부터 볼세비키까지, 그리고 비밀 무장투쟁 옹호파부터 이른바 ‘68 혁명’ 이후 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력을 포괄한다. 이 책은 바로 이들의 활동 기록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이전까지 이 장벽은 동서분단과 냉전체제의 상징으로 통했다.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통일됐다.

미국 미시간대학 칼 포트 석좌교수인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좌파의 흥망성쇠, 공(功 )과 과(過)를 냉철하게 펼쳐 보인다. 저자가 “이 책을 쓰는데 20년이 걸렸다”며 “이 과정에서 몇몇 소중한 가설과 고이 간직해온 신념을 기꺼이 재고하고 포기해야만 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공을 들였다. 1848년부터 2000년 까지 150년 동안의 역사를 다루다 보니 분량이 엄청나지만 치밀한 추적과 나름대로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대하소설을 보는 느낌마저 든다.

저자는 “모름지기 좌파의 역사는 인간의 잠재력을 제한하고 왜곡하며, 공격하고 억압하고, 때로는 심지어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는 불평등의 체제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결론짓고, “이 역사는 분명히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가 존재, 발전하는 한 어떤 형태로든 좌파는 유효하다는 얘기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구성됐는데 마지막 4부에서 좌파의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잠재력들의 윤곽을 그려보려 한 것도 이 같은 의도에서다.

하지만 그는 똑 부러진 대안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세계화는 창의적인 정치적 관심을 필요로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세계화의 독특한 사회관계가 무엇이며, 현재 어떤 형태의 문화와 신념체계가 만들어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런 문화와 신념체계를 둘러싸고 어떤 형태의 정치가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그는 그러나 “90년대에 신자유주의는 이념적 빈 공간에 ‘현대성’이란 산만하고 공허한 말만 제시했고, 잔존한 사회주의 정당들 역시 이를 모방해서 대응하는데 급급했다”며 “이미 짜맞춰진 새로운 영역에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있던 ‘새로운 중도(New Center)‘나 ‘제3의 길’ 같은 공허하고 불명확한 개념은 실행 가능한 민주적 변화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의 대체물이 결코 되지 못한다”고 대못을 박는다. 원제는 『Forging Democracy 』(2002)다. 

이만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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