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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바둑, 진단과 제언 ① 너무 좁고 위험한 프로 입문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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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바둑이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중국에선 고대로부터 ‘만 가지 놀이의 제왕’으로 통했고, 19세기 이후 바둑을 접한 서양에선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게임’으로 불려온 바둑. 5000년이나 되는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지적 유희였고 동반자였던 바둑이 21세기 한국에 와서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바둑은 세계 최강이고 대학에는 세계 유일의 바둑학과가 존재한다. 바둑 TV와 인터넷 사이트들은 흑자를 내고 있고 프로 대회는 지난해만 해도 32개나 치러질 정도로 호황인데 웬 뜬금없는 위기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바둑 보급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유소년 팬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명확한 신호라는 것이다.

고전적인 바둑은 분명 현대 문명이 초래한 혼란 앞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다. 모든 빠른 것들이, 그 이미지들이 바둑의 적일 수 있다. 장막 안에서 천리를 내다보는 깊은 사색과 정물적인 고요함을 특징으로 하는 바둑이 화려하고 동적인 연예·스포츠·게임 등과 경쟁하며 대중의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말 못할 고통일 수 있다. 그러나 바둑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은 ‘바깥’보다 ‘내부’가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바둑은 인터넷이나 TV와도 궁합이 잘 맞아 내부의 비현실적인 제도만 해결하면 바둑 그 자체가 지닌 무수한 장점들이 새로운 동력을 얻어 부흥의 길을 걸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바둑이 최근 ‘스포츠’가 된 것도 기회일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바둑 위기설을 증폭시키는 내부 문제란 무엇일까. 시리즈로 짚어 본다.

2부리그를 만들자

매년 프로 입문 8명뿐 … 9단 실력의 연구생들 대회 출전 한번 못해보고 19세 넘으면 꿈 접어

 서울 반포에서 바둑 도장을 27년째 운영하며 이세돌 9단 등 수많은 스타를 배출해낸 권갑룡 7단은 최근 눈물을 흘리며 앞일을 걱정하는 프로 지망생 K군과 그 어머니 앞에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89년 3월생인 K군은 올해 3월이 되면 만 19세가 되어 규정에 따라 한국기원 연구생에서 나가야 한다. 프로 지망생에게 연구생 퇴출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프로의 꿈을 접어야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바둑 공부를 시작해 그 어렵다는 한국기원 연구생 중에서도 1조까지 올라갔지만 이제 만사 물거품이 된 것이다. K군과 실전 훈련을 했던 서봉수 9단은 “실력이 나보다 낫다”고 말한다. “당장 프로에 가도 9단들과 맞겨뤄 20승 이상 올릴 수 있는 실력”을 갖췄건만 K군처럼 병목으로 꽉 막힌 입단의 지옥문에 가로막혀 떠나야 할 실력자들이 올해만 해도 15명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철든 뒤 바둑만 해온 그들은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K군과 비슷한 실력으로 경쟁하던 이원도 초단은 지난해 아슬아슬 프로 입문에 성공했다. 그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전자랜드배 청룡왕전에 출전, 1회전에서 3관왕이자 한국 랭킹 3위인 박영훈 9단을 꺾었다. 그러니 퇴출 선고를 받고 영영 떠나야 하는 당사자나 그 부모들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질 리 없다. 연구생 1~3조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지난해 초단 돌풍을 일으켰던 한상훈 2단이 이미 증명한 바 있다. 88년생인 한상훈은 2006년 12월에 막차로 입단에 성공했으나 현재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 올라 이세돌 9단과 자웅을 겨룰 준비를 하고 있다. 한상훈은 바둑대회를 훨씬 재미있고 풍성하게 만들어 줬다. 하지만 소문 없이 사라진 또 다른 ‘한상훈’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9월 자신의 마지막 입단대회를 가슴 졸이며 통과한 이현호 초단은 이번 청룡왕전에서 송태곤 8단을 눌렀다. 강북의 명문인 허장회 도장에서는 김현섭과 이춘규 두 명이 지난 연말 그야말로 벼랑 끝에서 문턱을 넘었다. 문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비슷한 실력자들이 프로 무대에 서보지도 못한 채 10여 년 각고의 노력을 허사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2부 리그도 세미 프로도 없이 한번 떠나면 영영 그만이라는 점은 바둑의 외피를 척박하게 만든다.

이건 그냥 경쟁에서 이긴 자와 진 자의 얘기가 아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처럼 좁고 험난한 입단의 길이 수많은 바둑 지망생을 일찌감치 바둑과 멀어지게 만든다는 점이다. 양재호 9단은 “출중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중학교 1학년이나 2학년에서 멈춘다”고 말한다. 이 여파로 전국의 바둑교실도 10년 전 1500개에서 지금은 500~600개로 감소했다. 부모들은 두뇌 개발보다는 이창호 같은 스타가 될 자질이 있나를 테스트해 보기 위해 학원에 보내는 경우가 더 많은데 그러다가 공부만 망칠까 봐 아예 포기한다는 것이다.

한국기원은 매년 남자 8명 을 입단시킨다. 전국에서 뽑혀온 한국기원 연구생은 남자 120명 . 그 밑으로는 연구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실력자들이 줄을 서 있다. 병목은 나날이 심해져 가는데 “그것도 많다” “또는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프로기사들이 다수다. 많은 프로기사가 프로 지망생을 가르치며 그 수입으로 생활하는데도 이 인식은 변하지 않는다.

바둑보다 훨씬 늦게 프로 제도가 도입된 골프의 경우 2부 투어와 같은 꿈나무 대회가 따로 있어 일찌감치 대회에 나가 자신을 테스트해 볼 수 있다. 아마추어 우승자도 프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그러나 바둑은 지난해부터 세계 아마대회 우승자에게 주던 프로행 티켓마저 차단했다. 지난 세월 이 혜택을 받은 사람은 불과 3명뿐이었음에도.

한국기원은 왜 입단 문호를 넓히지 않는 것일까. 사무국은 힘이 없고 힘 있는 원로·중견 기사들은 반대 정서가 강하기 때문이다. 유소년 팬이 줄어드는 이면에 ‘게임’이 큰 몫을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동시에 바둑은 게임이 내포하는 폭력성이나 즉흥적 사고를 치유해 깊은 사색의 길로 이끌 수 있는 양질의 게임이라는 것 역시 두말할 나위가 없다. 바둑은 살려야 한다.

그러나 유소년 팬이 줄어든다는 것은 바둑의 물줄기가 끊어지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한 프로기사는 “위기가 아니라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글=박치문 전문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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