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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조선 사대부와 꺼삐딴 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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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배우성 서울시립대 교수는 “조선 초기만 해도 중국어 회화에 능통한 문신이 적지 않았다”며 “명나라 사신이 오면 그 문신들이 임금 앞에서 통역하는 어전통사(御前通事) 역을 맡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오랑캐의 나라’라고 경멸하던 청나라가 중국어의 지배자로 등장하면서 중국어 회화에 대한 조선 지식인의 관심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와 달리 사신 접대에 참여했던 신하들을 영예롭게 여기는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제 중국어 회화를 배우는 것 자체가 조선 사대부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되었다”고 배 교수는 설명한다.

나는 국제어에 대한 지식층의 무관심이 결국 조선의 운명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웃 일본이 네덜란드어를 국제어로 받아들여 열심히 서양의 학문·기술을 흡수한 뒤 19세기에 재빨리 영어로 방향 전환을 한 것과 비교하면 조선은 너무나 우물 안 개구리였다. 한때 네덜란드어 교사까지 지낸 후쿠자와 유키치가 네덜란드어를 버리고 영어를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 1859년, 개항한 요코하마를 구경한 직후였다. 거리의 간판이 온통 영어로 쓰인 데 충격받았기 때문이다. 일본은 1900년에 니토베 이나조가 일본 사무라이 문화를 일방적으로 미화한 『무사도』를 영어로 집필해 미국에서 출판할 정도로 국제어 강국이었다. 이 책을 애독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나는 일본이 조선을 손에 넣는 것을 보고 싶다. 조선은 자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로 일본에 우호적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반면 조선은 어땠는가. 개화기의 영어 고수로 영어 일기까지 쓴 윤치호가 자주 거론되지만 그는 뼛속까지 일본 추종자였다. 니토베 이나조가 영어를 열심히 배워 자기네 문화를 서양에 널리 알리는 데 써먹은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윤치호 식 영어, 윤치호 식 국제화는 국제화가 아니다. 1962년 동인문학상을 받은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를 상기해 보자. 주인공 이인국은 일제 때 제국대학을 나온 의사다. 식민지 시절에는 ‘국어(일본어) 상용의 가(家)’라는 칭호를 자랑스러워했다. 해방 후 그가 살던 북한 지역에 소련군이 들이닥치자 러시아어 회화를 익히는 데 열중한다. 아들은 모스크바로 유학 보낸다. 홀로 남한으로 탈출한 뒤에는 다시 영어다. 미국에 보낸 딸은 미국인과 결혼하고, 그도 뒤늦게나마 미국에 유학가려고 발버둥친다.

지금의 영어는 조선시대의 중국어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고 쓸모 많은 국제어다. 따라서 자라나는 학생이 영어를 더 잘 하게끔 정부가 행정력과 예산을 동원하는 게 당연하다. 영어 가능 여부에 따라 처지가 엇갈리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와 언어차별(linguicism)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다. 내친 김에 영어 얘기만 나오면 기죽는 어른들도 배려했으면 한다. 그러나 영어 몰입 교육이라든가 영어 표기법을 획기적으로 바꾸자든가 하는, 설익은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것은 문제다. ‘오렌지’를 미국인이 못 알아듣는다는데, 그렇다면 표기를 ‘어륀지’로 바꾸면 알아듣겠는가. 영어교육도 어디까지나 백년대계라는 교육 문제다. 너무 급히 서두르는 것 같아 지켜보기에 조마조마하다. 조선 후기 지식층의 꽉 막힌 소아병과 『꺼삐딴 리』의 주견 없는 약삭빠름. 둘 다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