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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밀리면 5년 끌려 다닌다’ 몸도 풀기 전 바로 링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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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역대 정부는 출범 후 대체로 6개월가량 노·정(勞·政) 간 ‘허니문’을 가졌다. 서로 웬만한 일은 안고 가거나 눈감아 줬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에선 양상이 다를 것 같다. 밀월은 고사하고 새 정부가 출범하기도 전에 기 싸움이 전개되고 있어서다. “법과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안 만나겠다”는 당선인 측과 “30일부터 ‘상응 투쟁’을 하겠다”는 민주노총 측의 입장은 평행선이다. 따라서 이번 마찰은 새 정부 5년간의 노사관계를 가늠할 바로미터가 될 전망이다. 그래서인지 양측은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을 태세다.

민주노총은 이미 12월까지의 투쟁계획을 모두 짜 놓았다.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은 29일 “이 당선인이 뭐라고 하든 우리는 우리가 계획했던 길을 뚜벅뚜벅 갈 것”이라고 말했다. 당선인 측이 요구한 경찰 출두는 “턱도 없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우문숙 대변인은 “(이 당선인의 행보가) 그런 식이면 이 위원장이 출두하자마자 구속시킬 것”이라며 “뻔히 보이는 노동탄압을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말했다. 올해 투쟁에 사활을 걸고 있는 것이다.

◇왜 이랜드인가=민주노총이 이랜드 산하 매장을 첫 싸움터로 잡은 것은 여러 가지 포석이 깔려 있다. 이랜드 매장은 ‘80만원 아줌마들’이 한꺼번에 해고된 곳이다. 종아리가 퉁퉁 부을 정도로 일하고 한 달에 80만원을 받다 일터를 잃은 비정규직 문제를 투쟁 전면에 내세우려는 전략이다. 대중성과 인지도가 높은 분규 현장이면서도 여느 사업장과 달리 동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된 곳이라는 점을 활용하는 것이다.

김동우 민주노총 비정규실장은 “여론이 아줌마들에게 우호적이어서 몇 명만 매장 앞에서 불매운동을 해도 자연스레 매장이 봉쇄된다”고 말했다. 굳이 매장 점거와 같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최대한의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으로선 올 한 해 동안 계속될 싸움에서 고지를 선점하는 효과를 낼 수도 있다.

◇“주시하고 있다”=이 당선인은 현재로선 새 정부 출범 전이라 직접적으로 민주노총을 제어할 힘이 없다. 그렇다고 이랜드 매장을 둘러싼 싸움에서 물러설 수도 없는 입장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새 정부에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사안인 데다 이번에 밀리면 노사관계 구상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정부가 출범하면 민주노총의 파업에 강경하게 대응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이런 생각은 당선인의 신년사에 잘 녹아 있다. 이 당선인은 “‘떼법’이니 ‘정서법’이니 하는 말도 우리 사전에서 지워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1981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파업에 들어간 항공관제사를 모두 해고했다. 대통령의 ‘복귀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인수위 관계자는 “사태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불법 투쟁을 하면 강경 조치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인수위 주변에서 나온다. 걸리면 한 방에 몰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읽힌다. 박덕제(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노동경제학회장은 “양보 없는 대치를 하면 서로 생채기만 날 수 있다”며 “산업평화를 위해서도 새 정부가 출범한 뒤 노동부 장관을 중심으로 대화의 틀을 복원하는 게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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