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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여행이 아닌 일상 속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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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24면

해외여행 1200만 명 시대, 하루가 다르게 여행 관련 책이 쏟아져 나온다. 실용 가이드북부터 문인들의 에세이, 스타의 특정 도시 ‘직찍(직접 사진을 찍음)’ 체류기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인터넷엔 수많은 네티즌이 개별 여행담을 실시간으로 써 올린다. 여행이 목적인지 여행 뒤에 ‘썰’을 풀기 위해 떠나는 건지 헷갈릴 정도다.

제목부터 남다른 『피스보트』는 사실 여행서 범주에 넣기가 모호하다. ‘평화를 꿈꾸는 여행자의 세계일주’라는 부제에서 평화는 여행지에서 느긋하게 마시는 커피 한잔이 아니다. 그런 평화가 꿈이라면 굳이 일상을 벗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 평화는, 총성이 끊이지 않는 분쟁의 땅에서 난민들이 갈구하는 물, 식량, 양초, 기름, 의약품, 기도의 순간을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어느 누구에겐 일상인 것이 왜 다른 누구에겐 갈구의 대상이 되는가. 『피스보트』는 말하자면 그런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의 기록이다.

‘피스보트(Peace Boat)’는 1983년 처음 출항, 현재까지 60여 회 이상 지구촌 시민들을 승선시킨 평화의 배다. 역사교과서 왜곡에 반대하는 뜻있는 일본 젊은이들이 태평양전쟁 피해국들을 둘러보자는 의도로 시작해, 90년 제10차 항해 때부턴 세계일주 코스로 확장됐다. 100여 일에 이르는 항해기간 동안 인류사 질곡의 현장들을 둘러보면서 상임활동가와 탑승자들 사이에 깊이 있는 토론이 이뤄진다. 제3세계 구호활동도 펼치고, 정치적인 사안에 적극적인 목소리로 개입하는 ‘국제NGO’이기도 하다.

일간지 사진기자인 글쓴이가 피스보트에 탄 것은 2005년이 두 번째다. 2003년 이라크전 취재를 시작으로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그는 피스보트의 51번째 항해이자 26번째 세계일주에 동행 취재할 기회를 얻었다. 9월 4일 일본 요코하마항을 출발, 103일간 아시아·아프리카를 거쳐 유럽·중남미·태평양의 20개 지역을 둘러보는 일정이었다. 스태프와 선원까지 1500여 명에 이르는 세계인들과 생활하면서 취재 여행을 했다.

선상 평화교육을 지면에 옮기지 않는 한 세계일주와 피스보트를 딱 부러지게 가를 순 없다. 오히려 날짜변경선을 지날 때 시차변경에 따른 ‘잃어버린 시간’을 아쉬워하는 대목이나, 이집트 기념가게에서 20달러짜리 고양이 인형을 흥정 끝에 4달러에 산 얘기 등을 보면 여느 여행자와 다름없는 소회다.

책에 실린 사진도 주민들의 일상과 관광 유적지를 담은 게 많아 일반적인 여행 후일담과 선뜻 차별화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이 종군기자의 기록이 아니란 걸 되새김질하라. 피스보트 일주는 현재 벌어지는 분쟁의 땅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분란과 수탈의 역사를 기억하고 그 현재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 있다. 어쨌든 우리가 여행지에서 봐야 할 것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생동하는 미래 아니던가.

여행의 색다른 기록으론 『윈난: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도 빼놓을 수 없다. 사진가 이상엽·이갑철·정일호, 카피라이터 이희인, 시인 박노해, 여행가 황성찬, 그리고 직장인 황문주씨가 함께 엮은 책은 중국 윈난의 매력을 7인7색으로 펼치고 있다. 푸얼차의 고향이자 서구인에게 ‘샹그릴라’로 불렸던(그래서 결국 이름을 ‘샹그릴라’로 바꾼 중뎬 지역도 이 윈난에 포함된다) 지방의 대자연과 소수민족 문화, 개발의 광풍이 풍성한 사진과 함께 소개된다.

이런 책은 사실 읽기보다 넘기게 되기 마련이고 넘기면서 ‘나도 떠나고 싶다’란 생각을 하게 되지만, 어쨌든 떠나는 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여행기를 남기는가. 차마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한편으로 골리고 다른 한편으론 위로하기 위해.

‘누가 우리를 소수라 하는가/누가 우리를 작다고 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충분하다/ 그대가 우리를 가난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그대가 우리를 초라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소수인 우리는 작은 욕심으로 충만하고/ 가난한 우리는 맑은 가난으로 아름다우니’ (박노해 시인이 윈난 석두성 나시족 주민들에게 바친 시 ‘누가 우리를 소수라 하는가’ 중에서)

『피스보트』
이정용 글·사진, 넥서스북스 펴냄, 300쪽, 1만2000원

『윈난: 고원에서 보내는 편지』
박노해 외 지음, 이른아침 펴냄, 319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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