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커버스토리] 영부인 패션‘X 파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1면

 

대통령 부인들의 옷을 만든 이들은 스스로 드러내길 주저했다. 하나같이 그랬다.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자랑이 지나쳐 혹시라도 누가 될까 해서다. 이들의 디자인에는 중용의 덕이 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아름다움이다. 좌로 부터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 이리자 · 김예진씨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대통령 선거가 열린 지난해 12월 19일. 이명박 당선인 부부가 개표 결과를 기다릴 때 이 당선인의 파란 넥타이보다 눈길을 끈 건 김윤옥 여사의 투피스였습니다. 김 여사는 한나라당의 상징색인 에메랄드빛 투피스에 리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습니다. 2월 25일 청와대에 들어가는 김 여사는 앞으로 어떤 옷을 입을까요. 이런 궁금증에서 week&은 역대 대통령 부인들의 패션에 대해 취재했습니다. 대통령 부인들의 옷을 짓고 머리를 만진 사람들을 만나 숨겨진 뒷얘기를 들었습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대통령 부인들의 패션 뒷담화, 같이 들어보시죠.

글=홍주연·이영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분명한 취향 세련된 감각 김윤옥

전문가들은 김윤옥 여사의 일상복 패션을 ‘귀부인 스타일’이라고 평가했다. 지난해 한나라당 경선에서 이명박 당선인의 패션을 조언했던 디자이너 박윤수씨는 김 여사의 스타일에 대해 “매일 아침 나와 함께 당선인의 옷을 고를 정도로 취향이 분명하고 감각이 세련됐다. 단 본인 스타일을 잘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김 여사 덕분에 한복 경기가 기지개를 펼 것으로 기대한다. 대통령 부인이 한복을 즐겨 입으면 한복 소비도 덩달아 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김 여사는 얼굴이 동글동글해 한복이 잘 어울린다. 시장 부인 시절에도 한복을 자주 입었기 때문에 청와대에서도 많이 입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청와대에서 김 여사의 패션을 누가 담당할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과감한 색상·문양 척척 소화 권양숙

 권양숙 여사의 패션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은 후했다. 양장·한복이 다 잘 어울리고 원색부터 은은한 색까지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청와대에 따르면 권 여사의 양장은 비서가 백화점에서 구입하고 한복은 서너 명의 디자이너가 만든다. 남북 정상회담에서 권 여사의 한복을 담당한 디자이너 김예진씨는 “권 여사는 과감한 색상과 문양이 잘 어울린다. 화려한 색의 한복에 무궁화, 십장생,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등을 날염기법으로 자주 그려 넣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권 여사가 북한에 갔을 때는 황금색 한복을, 호주에 갔을 때는 푸른색 저고리에 보라색 치마를 만들어줬다. 군사 분계선을 넘을 때 권 여사가 입어 화제가 된 진달래색 양장은 김정숙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한복에 쓰이는 염색기법을 사용해 진분홍색 투피스를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권 여사의 헤어스타일은 이희 헤어앤메이크업 이희 원장이 담당한다. 이 원장은 두 달에 한 번 청와대에 들어가 권 여사의 머리를 손본다. “2004년이었어요. ‘발신자표시 제한’으로 휴대전화가 걸려왔어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청와대에 들어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직원들에게도 비밀로 하고 갔지요.” 이 원장은 전체적으로 무거워 보이는 권 여사의 헤어 스타일에 층을 내 젊어 보이도록 연출했다. 이 원장은 권 여사에게 여론의 흐름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해준다고 한다. “권 여사는 정이 많으신 분입니다. 얼마 전에는 퇴임 전 마지막이라며 내실에서 기념 사진도 찍고 감과 모과를 바구니에 싸주시더군요.”

66사이즈에 약간 긴 치마 이희호

이희호 여사는 한복보다 양장을 좋아했다. 디자이너 노라 노는 “이 여사는 편하고 실용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다. 체형이 날씬한 편이라 66사이즈에 치마만 약간 길게 입었다”고 전했다. 노씨는 이 여사가 청와대 가든 파티에서 입었던 연노랑 투피스를 만들어 준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 옷은 한참이나 화제가 됐다”며 노씨는 웃었다. 그는 이 여사가 해외 순방을 갈 때 체크무늬 앙상블과 코트·원피스 세트 등도 맞춰줬다.

 이 여사는 한복도 편안한 개량식 옷을 즐겨 입었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씨는 “청와대 들어가기 전에 이 여사가 개량 한복을 주문한 적이 있다. 그때도 ‘청와대에서는 불편하게 긴 한복 치마를 입어야 하느냐’고 물어보셨다”고 말했다. 한복 디자이너 이리자씨는 “이 여사가 대퇴골을 다친 다음에 편하게 입으시라고 치마의 폭을 좁히고 길이는 짧게 만들어 드렸다”고 전했다.

후반기엔 차이나 칼라 스타일 손명순

 이에 비해 손명순 여사는 양장보다 한복을 선호했다. 손 여사의 며느리이자 김현철씨의 부인 김정현씨가 행사가 있을 때마다 디자이너 이영희씨를 찾아와 한복을 맞춰 갔다. 이영희씨는 “손 여사는 차분한 색이 어울리는데 본인은 화려한 색을 원했다. 그래서 수를 은은하게 놓거나 안감을 진한 색으로 맞춰 전체적인 색깔 톤을 낮추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손 여사도 문민정부 후반부에는 양장을 주로 입었다. 옷깃이 목까지 올라오는 차이나 칼라 스타일이 많았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 대통령 부인이 사치품으로 비치는 한복을 입으면 여론이 좋지 않다는 조언 때문이었다.

사진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권양숙, 이희호, 손명순, 프란체스카, 김윤옥, 김옥숙, 육영수, 이순자 여사

최고의 한복 모델 김옥숙

전문가들은 김옥숙 여사에 대해 ‘육영수 여사 이후 옷을 가장 잘 입었던 대통령 부인’이라고 평했다. 김 여사의 한복을 담당한 이영희씨가 “내 옷을 가장 잘 소화한 모델은 김옥숙 여사”라고 말할 정도다. 실제로도 김 여사는 육 여사의 스타일을 상당히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로 미색·옥색 등 은은한 색의 한복을 입었다. 김 여사는 직접 옷감과 바느질, 디자인을 고를 정도로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과 회담을 할 때였어요. 제주도 유채꽃 색상과 어울리는 연노랑 한복에 난초 문양의 수를 놓았지요. 대통령 부인이 미국에서 교포들을 만날 때는 고향생각이 나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맞춰줬고요.(이영희)” ‘보통 사람’을 강조한 노태우 정부에서는 영부인도 값비싼 소재나 튀는 색상을 피했다고 한다. “아무리 추워도 값비싼 모피를 쓸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 부부가 모스크바에 갈 때는 조끼 안쪽에 보이지 않게 밍크 털을 대줬습니다.” 이씨의 설명이다.

금·은박 넣은 화려한 옷 이순자

 이순자 여사는 지나치게 화려한 옷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금사로 수를 놓거나 치마에 금·은박을 넣기도 했다. 공식 석상에 당의(조선시대의 여성 예복으로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를 입고 나와 여론의 비난을 받은 적도 있다. 이 여사의 한복을 담당한 사람은 이리자씨였다. 이씨는 이 시절부터 대통령 부인의 한복이 디자이너 의상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이 여사가 화려한 옷을 좋아해 내가 금박 문양을 개발하고 치마도 풍성하게 만들어 줬다. 시가의 10배 정도 하는 옷들이었지만 이 여사가 이 옷을 세계에 알렸기 때문에 자랑스럽다”고 설명했다. 경원대 의상학과 조효숙 교수는 “1980년대 국민소득이 올라가면서 한복도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이 여사의 옷 때문에 당의나 자수가 들어간 한복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잣집 마나님 의상의 나침반 육영수

육영수 여사의 패션은 지금까지 대통령 부인 의상의 ‘교과서’로 불린다. 이리자씨는 “육 여사는 목이 길어 한복을 입으면 뽀얀 목덜미가 돋보였다. 부잣집 마나님들도 앞다투어 육 여사를 따라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목이 길어 보이라고 저고리 뒷선을 둥글게 파줬다”고 회상했다. 정작 육 여사는 유명 디자이너의 한복을 입지 않고 개인적으로 옷을 주문해 입었다. 흰색을 유난히 좋아해 하얀 저고리도 많이 입었다.

 디자이너 노라 노씨는 육 여사의 양장을 몇 번 만들었다. “육 여사가 청와대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어요. 밤중에 군 관계자가 지프를 타고 와서 저를 실어갔지요. 그때만 해도 육 여사는 옷장에 입을 만한 옷이 없었습니다. 투피스를 만들려고 치수를 재는데 어린 지만씨가 엄마 치마를 잡아당기더군요.” 노씨는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독일을 방문할 때 국산 실을 사용해 크림색 원피스를 만든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어떤 옷을 만들어도 육 여사는 우아하게 소화했다”는 것이 노씨의 평이다.

평생 입은 자주색 치마저고리 프란체스카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복을 많이 입었다. 1950년대에는 고름 대신 브로치를 달거나 짧은 통치마를 입는 등 개량 한복이 유행했다. 이리자씨에 따르면 프란체스카 여사는 보라색·분홍·와인색을 좋아했다. 이씨는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자주색 치마 저고리에 ‘목숨 수’자를 수놓아 드렸다. 그 옷을 정말 좋아해 평생 입고 다니셨는데 입관할 때도 입으셨다고 며느리 조혜자씨가 말했다”고 전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