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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VS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VS 판타스틱 소녀 백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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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를 보러 극장으로 향했을 때 나는 이미 항복할 준비를 한 채 전장에 나가는 병사와도 같았다. 주연 배우 빌 머레이 때문이었다. 그가 나오는 영화라면 어떤 품질이든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그의 팬이다.

더구나 골든 글로브를 받은 명연이라고 소문이 났다지? 난 이 사람 뜰 줄 알았어. 냉소적인 그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는 아니지만 어느 역할에서건 여러 개의 '결'을 만들어내는 배우지.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쇼'에서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그는 코미디 영화의 단골 조역으로 자리잡았지만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블랙홀'에서 숨어 있는 부드러움을 드러냈고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서는 사랑의 슬픔에 빠진 연기로 극찬을 받았지.

그런데 이 영화, 내가 미리 항복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난 거의 KO당했다. 도쿄의 화려한 불빛 속에서 잠들지 못하는 중년의 미국 배우와 20대 초반의 여성. 이국땅에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으로 가까워진 그들은 인생의 고민을 나누면서 묘한 애정을 느끼게 된다. 짧은 만남 뒤의 아쉬운, 그러나 슬프지 않은 이별. 이럴 수가. 이게 서른세살 여자감독의 두번째 작품이란 말이지.

감독은 일본말을 모르는 미국 배우라는 설정으로 웃음을 이끌어내고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이 겨우 발을 슬며시 잡아주는 동작으로 어떤 에로틱한 베드신보다 큰 울림을 던졌다.

또 관객에게 들리지 않는 두 사람의 귓속말과 미소로 해피 엔딩의 기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통속적인 결말을 피해가는 솜씨라니. 특히 호텔 로비에서 헤어지기 직전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 머레이의 표정은 내가 그의 영화에서 바라던 모든 것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그의 얼굴은 주름살 하나하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심지어 얽은 곰보자국을 통해 안타까움과 간절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거야. 이런 그의 얼굴을 또 본 적이 있지.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에서 사랑하던 선생에게 퇴짜를 맞고 맥스의 집 앞에 서 있을 때 보여줬던 사랑에 실패한 자의 얼굴. 수백마디의 대사를 대신하는,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 그 슬픈 얼굴.

외국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보며 데이비드 린의 '밀회'나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선라이즈', 잉마르 베리만의 '거울 속에서 어렴풋이', 왕자웨이의 '화양연화'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자꾸만 2년 전에 본 '판타스틱 소녀 백서(Ghost World)'가 떠올랐다. 그건 여자 주인공 스칼렛 요한슨이 이 영화에도 출연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둘 다 한글 제목 번역 과정에서 영화의 원래 분위기를 잃어버렸다는 (로스트 인 트랜슬레이션!) 공통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아웃사이더'로서 동지의식을 느끼는 젊은 여자와 중년 남자가 친밀감을 느낀다는 설정 때문일 거다. '사랑도…'에서 두 미국 남녀는 일본이라는 낯선 곳에서 아무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동병상련으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판타스틱…'를 보면 자신의 고향인 미국에 온다 해도 주위와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궤도 바깥으로만 맴돌 뿐이다.

'판타스틱…'의 스티브 부세미와 도라 버치는 인도 음악을 계기로 가까워지고 78회전 레코드를 수집한다. 너무나 '마이너'한 이들의 감성이 미국 사회와 통할 가능성은 '사랑도…'의 주인공들이 일본인들과 유창하게 대화할 가능성만큼이나 작다. 그들의 취향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외계인의 언어인 것이다. 스티브 부세미는 말한다. "나는 세상 99%의 사람과 통하지 않는 것 같아." 그래서 그들은 늘 외롭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서로에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자기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모르는 젊은이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행복인지 불행인지를 알 수 없는 중년의 막막한 심정이 느껴지는 것 역시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사랑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요한슨의 "뭘 해야 잘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나이가 들면 나아질까요?"라는 질문과 머레이의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세상을 얻은 듯한 즐거움과 함께 그 전에 가지고 있던 인생이 송두리째 뒤바뀌어 버린다"는 고백이었다. '판타스틱…'에서 도라 버치는 세상 모든 사람을 바보 같다고 경멸해 버리지만 정작 그 유령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은 어디에도 서 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물론 '판타스틱…'는 '사랑도…'보다 훨씬 독특한 소수의 팬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이른바 독립영화적인 감성이 진하다. 그래서 전 세계 140개 매체에서 뽑은 '올해의 영화'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판타스틱…'는 '사랑도…'처럼 골든 글로브 같은 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틀 후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사랑도…'가 남우주연상을 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다시 빌 머레이로 돌아가서, 난 그 배우가 오스카 수상에 빛나는 '누구나'의 스타가 아니라 '나만의 '스타로 남아 있길 바라기 때문이다.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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