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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써니와 내가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는 꼬라지를 퇴근길의 버스 정거장에 몰려 선 사람들이 지겹지 않은 시선으로구경해주었다.와아 나는 정말이지 쪽이 팔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써니는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 다.
써니는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내 재킷의 지퍼가 튿어지든 말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써니는 나를 부스 안으로 밀어넣으려고 힘을 쓰면서,뻐얼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연신 악을 써댔다.
『걔네들하고 딱 매듭을 지으란 말이야.내 앞에서 전활 하란 말이야.』 나는 내 재킷의 소매 부분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던 써니를 거칠게 밀어버렸다.재킷의 어깨와 팔이 맞닿는 부분이찌이익 튿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아니 그것보다 써니가 길바닥에 엎어졌다.
써니는 길바닥에 주저앉아서도 계속해서 소리쳤다.
『넌 더러워.넌 더럽지만…내가 깨끗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거잖아.』 난 써니를 다시 일으켜세워 주어야 할지 아니면 어서 빨리그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은지를 잠깐 망설이고 있었다.
『넌 내 거야.나 혼자면 다 된다구.왜 그걸 몰라….』 써니가 울상을 짓고 간절하게 말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다.
나는 몸을 돌리고 무작정 뛰었다.어디로든 상관없었다.그저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이면 되었다.그리고 써니의 시선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면 되었다.
그 뒤로의 일주일쯤 나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세상과 사람들이 조금씩 다 무서웠던 거였다.나는 방에 콕 틀어박혀서,써니와의 옛 일을 떠올렸고 써니가 미국에서 겪었을 생활을 상상해보았고 그러면서 지금의 써니 때문에 가슴아파 하였 다.그렇지만써니에 대한 다른 대책이 서는 것도 아니었다.다시 써니를 만날자신은 솟아오르지 않았다.
상원이가 대입 수능시험을 치르는 날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상원이네 집으로 가서 아침을 같이 먹었다.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덕순이가 찾아왔다.상원이 어머니는 덕순이에게 「왔어?」라고만 하시고는 상에 덕순이의 밥과 국을 더해주었다.벌써 여러번을 만나본 사이 같았다.상원이 어머 니는 어딘가불안정하게 보였는데 아마도 상원이 보다도 더 긴장하셨기 때문인것 같았다.
우리 셋은 상원이 어머니에게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길로 나섰다.어머니가 상원이의 손에 지폐 몇장을 쥐어주면서 상원이의 손을 쓰다듬었다.그러다가 긴장한 목소리로 한 말씀 하셨다. 『너무 긴장하면 본래 실력도 안나온디여.』 『무슨 더 나올 실력이 있기나 하대요 어머니.』 상원이를 고사장에 들여보내고 나서,나는 덕순이와 오후에 다시 고사장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하고 학교로 갔다.
학교에 갔다가 오후 3시반쯤 해서 커피숍에 갔는데 덕순이는 구석자리에 벽을 향해 앉아 있었다.덕순이는 내가 다가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덕순이는 눈을 감고 기도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 잘될 거야.상원이가 보통 놈은 아니잖아.』 덕순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나는 덕순이와 상원이가 너무나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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