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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선율 속 ‘느림’의 미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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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07면

사통팔달로 뚫린 학동 사거리에서 압구정 로데오거리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캘리포니아피트니스’로 유명한 디자이너클럽 빌딩이 보인다. 연예인들도 자주 찾는다는 이 번화한 랜드마크의 맞은편 골목에 피트니스센터, 성형외과, 피부과, 부티크가 어깨 걸고 이어진다. “가는 곳마다 모델·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유하의 시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중에서)라던 시인의 풍자도 이젠 지난 세기의 조바심이 돼버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도한 욕망과 질시의 행진이 거리의 감도(感度)를 높인다.

강남 클래식음반 전문매장 ‘풍월당’

이런 풍경을 헤집고 골목 안쪽(행정구역상으론 신사동)으로 고개를 돌리면 짙은 자줏빛의 ‘풍월당’이란 간판이 보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4층에 내려서면, 낮은 조도의 불그레한 조명과 섬세한 클래식 선율이 눈과 귀를 맞는다. 190㎡(약 60평)의 공간 삼면을 둘러 빈틈없이 짜인 음반과 DVD 진열대가 보기에도 탐스럽다. 우물쭈물 곁눈질만 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상냥한 목소리가 들린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음반매장 ‘풍월당’을 지키는 6명의 직원들. ‘풍월댁’이라 불리는 이들의 환대가 이곳에서 느끼는 첫 번째 따뜻함이다.

‘풍월당’은 오는 6월 개장 5년을 맞는 국내 유일의 클래식 음반 전문매장이다. 인근 4분의 1 크기 소형 매장에서 출발했다가 지난해 3월 옮기면서 확장 개장했다. 클래식 음반만 취급하고, 굳이 구매하지 않더라도 편안히 차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게 테이블과 의자를 갖춰놓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여기에 AV 시스템과 스크린을 갖춘 감상실 겸 강의실 ‘풍월채’를 마련한 게 업그레이드된 점이다. 지난해엔 ‘모차르트 오페라 22작품 전곡 해설회’를 진행했고, 올해도 이탈리아 오페라, 슈베르트, 고음악 감상 등 각종 클래식 강연 프로그램이 열리고 있다.

“‘풍월당’을 모르면 클래식을 모른다는 말과 같다”는 게 이곳 대표 박종호(48)씨의 자부심이다. 정신과 전문의인 그가 5년 전 휴업하면서 ‘풍월당’을 차렸을 때, “병원 문 닫고 클래식 매장 연 의사”라며 화제가 됐다. 실제론 인근에서 여전히 병원도 운영 중이란다. “’풍월당’은 돈 벌려고 연 데가 아니에요. 여기 매상은 임대료 주고 직원들 월급 주는 걸로 다 나가죠. 오페라 감상이 오랜 취미였던 데다 국내에선 돈 주고도 못 사는 귀한 음반들을 접할 통로를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실제로 국내에 수입되는 음반은 전부 이곳에 있고, ‘풍월당’ 입소문에 따라 교보문고 등 대형 매장 판매순위가 영향 받을 정도다. 이런 ‘파워’에 힘입어 용재 오닐·랑랑·알렉산드로 타로·백건우 등 국내외 유명 연주자와 팬들의 만남이 무시로 열리기도 한다.

‘풍월당’은 클래식 마니아와 전문가, 아티스트의 ‘협연’이 벌어지는 곳이다. 이곳 직원들은 단순히 음반을 파는 게 아니라 각자의 취향과 단계에 맞게 적합한 작품을 추천해주는 ‘큐레이터’ 역할을 한다. “국내외 1만여 회원들에게 매달 한두 차례 음악 이야기와 신보 추천을 담은 e-메일을 보내요. 매장에 들르는 ‘고수’들과 대화하면서 좋은 음반을 서로 추천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조금씩 저변을 넓혀가는 게 일하는 보람이죠.” 개장 때부터 ‘풍월당’의 색채를 가꿔온 최성은 실장의 말이다.

문화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란 건 박 대표의 생각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대중문화가 오래되면 클래식이 될 거란 건 틀린 생각이죠. 서양 클래식이 수백 년 동안 살아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어요.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치유해 줍니다. 눈은 감으면 그만이지만 귀를 막을 순 없잖아요. 이 점에서 미술보다 음악이 더 인간의 희로애락에 가까이 있죠.” 그는 구립 문화센터의 문화강좌에 질색했다. “제도적으로 끌고 가기보다 자생적으로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야죠. 음반을 사 모은다고 즐기는 게 아니에요. 가슴을 열어야, 감성적으로 다가서야 클래식의 맛을 알 수 있죠. 시적인 문화를 아끼고 보존하기 위해 누군가는 노력해야 해요.”

두 겹으로 포장한 음반에 ‘풍월당’ 간판과 같은 자줏빛 리본을 둘러준다. ‘인간의 손맛’을 느끼게 하기 위해 온라인 판매를 거부하는 가게답게 손님 한 명 한 명을 ‘귀빈’으로 대하는 세심함이 느껴진다. 카운터 뒤쪽 벽에 이곳의 단골이라는 법정 스님의 친필 글귀가 걸려 있다. ‘그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 고갯마루에 흰 구름 많지/ 다만 혼자서 즐길 뿐/ 그대에게 보내줄 수가 없네’.

찾아가는 길:
압구정 캘리포니아피트니스(옛 디자이너클럽) 맞은편 로데오거리 입구로 들어와
한양타운 다음 건물 캘빈 클라인 4층.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2번 출구에서 갤러리아백화점 방향으로 택시 이용. 02-512-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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