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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도 기업처럼 평가 받는 시대 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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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02면

“런던에는 두 개의 심장이 뛰고 있다.”

유럽 금융가에서 회자되는 말이다. 두 개의 심장은 전통의 런던 중심가인 시티(The City)지역과 런던 동쪽 끝 템스강변에 있는 ‘카나리워프(Canary Wharf)’를 뜻한다. 20년 전만 해도 쓸모없는 부두였던 ‘카나리워프’의 대변신은 놀라움 그 자체로 받아들여진다. 시티, HSBC 등 세계적인 금융회사 건물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금융 신도시로 탈바꿈했다. 시티와 카나리워프를 통해 거래되는 외환 규모는 하루 평균 1조4000억 달러(2006년 기준)로 전 세계 외환거래 가운데 3분의 1이 런던에서 이뤄진다. 런던이 세계 금융시장의 허브로 자리 잡은 것은 저성장-고실업이라는 ‘영국병’을 극복하기 위한 영국 정부의 부단한 혁신이 거둔 결실이었다. 특히 ‘금융 허브’ 목표에 맞춰 정부조직을 재정비했고, 세제와 규제 시스템을 뜯어고쳤다. 중앙은행을 정부에서 독립시켰고, 상속세 면세한도 2배 상향조정, 법인세율 2% 인하 등 감세조치를 잇따라 단행했다. 그 결과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2.8% 성장해 같은 기간 유럽지역 연평균 성장률(2.1%)을 웃돌았다.

혁신 신드롬은 비단 영국뿐만이 아니다. 선진국, 개발도상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정부(국가)혁신이 가장 큰 국정 과제로 다뤄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 같은 주요 선거마다 주요 쟁점으로 떠오른다. 미국에선 대선 때마다 공화·민주 양당 간에 정부 규모와 감세를 둘러싼 논쟁이 불붙고 있다.

일본의 경우 고이즈미 전 총리가 ‘우정성 민영화’를 앞세워 2005년 총선을 압승으로 이끈 데 이어 관료조직의 혁신을 꾀하고 있다. 공무원이 퇴직 후 관련 기업에 낙하산으로 취업하는 것을 금지했다. 우리나라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 1종 시험 폐지안도 나왔다. 1종 시험 출신이 중앙부처 과장급 이상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데 따른 부작용과 특권을 뿌리 뽑겠다는 것이다.

‘세계의 굴뚝’ 중국 역시 현재의 고성장에 만족하지 않고 비효율적이고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정부조직과 부처의 혁신에 골몰하고 있다. 28부의 정부 조직이 20개 미만으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정부조직 혁신 과정에서 미국 정부조직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프랑스는 사르코지 대통령 취임을 계기로 대대적인 개혁에 들어갔다. 52세의 사르코지는 ‘사르코지즘’(사르코지주의), ‘사르코노믹스’(사르코지 경제개혁정책) 등 신조어를 쏟아내며 ‘늙은 유럽’을 상징하던 프랑스에 혁신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세계 각국 정부가 너나 할 것 없이 혁신에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의 불필요하고 낭비적인 요소를 최소화해 ‘국가경쟁력’을 높여야만 보다 많은 기업을 끌어들이고, 보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러 가지 지표를 통해 각국의 혁신 성과에 대한 비교 평가가 이뤄지면서 국가 간 혁신 경쟁이 가열되는 분위기다. 기업활동 과정에서 몇 단계의 행정절차를 거쳐야 하는지, 국가가 수행한 정책들을 얼마나 책임성 있게 관리하는지, 기업들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게끔 법적 안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주고 있는지 등에 관한 국제기구의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각국 정부의 표정이 달라진다. 전자정부 구현 정도, 규제의 질적 문제, 정책의 효과성을 살펴보는 것도 혁신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주요 지표들이다.

이제는 정부도 증권시장에 공개된 기업처럼 평가받고, 경영진이 문책당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처럼 정부혁신이 국가경쟁력을 나타내는 지표로 부각된 것은 70년대부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복지국가를 지향하며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쏟아 부었다. 자연히 공무원 조직이 늘고 공공부문이 점점 커지게 됐다. 하지만 73년 오일쇼크 이후 국가 재정 건전성이 점차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세계 각국 정부는 어떻게 하면 비대해진 공공 부문을 줄이고, 민간 부문에 넘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 빠졌다. 그 결과 병원·철도·탄광·항공 민영화와 공무원 수 감축 같은 개혁이 뉴스로 등장했다. 이러한 흐름을 대변한 것이 80년대 이후 국가혁신의 주요 이론으로 자리 잡은 ‘신공공관리론’이다. ‘신공공관리론’은 이 시기 영국·미국을 비롯한 서구 선진국 혁신의 기본 이념이었다. 정부가 모든 서비스를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부분은 민간과 함께 운영하거나 민간으로 이양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서서히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경쟁에서 낙오된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고 구제할 수단이 사라진 것이었다. 양극화 현상도 두드러졌다. 기업은 이익이 나지 않으면 구조조정을 통해 직원 수를 줄이고 채산성을 맞추면 되지만 국가는 다르지 않으냐는 지적이 고개를 들었다. 네덜란드·핀란드·스웨덴 등 북·중부 유럽 국가들이 먼저 고민을 시작했다.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국민에게 필요하고 필수적인 서비스는 정부가 제공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민간과 아이디어와 기술을 공유하고 네트워킹을 구축하면서도 상호 경쟁을 유도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뉴거버넌스(신국정관리)’라고 부른다. 전반적으로 볼 때 전 세계는 여전히 신공공관리론 측면에서의 혁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본이 국경 없이 쉽게 넘나들 수 있는 자유경쟁 시대에는 민간 부문의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신공공관리론이 더 맞는다는 시각이 우세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 김영삼·김대중 정부가 ‘신공공관리론’을 내세우며 혁신을 시도했지만, 실제 현장에 효과적으로 적용하지는 못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벌어진 ‘작은 정부’ ‘큰 정부’ 논쟁도 이른바 혁신의 진행 과정에서 불거진 것이다. 한국행정연구원 은재호 박사는 “각 나라마다 정치·경제 상황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딱 떨어지는 답은 없다”며 “큰 정부건 작은 정부건 국민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꼭 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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